- 13장 진보나 발전
헤겔(1770~1831)의 역사철학은, 역사가 여러 단계를 거쳐 정신적이고 문화적으로 발전한다는 개념에 초점을 둡니다. 그의 관점에서 역사는 우연의 흐름이 아니라, 나름의 논리와 합리성을 지닌 움직임입니다. 모든 변화는 이전 시대가 안고 있던 모순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유 있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사회는 언제나 상충하는 요소들이 갈등을 빚는 구조 속에서 존재하며, 이 대립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발전의 원동력이 됩니다. 이것이 헤겔이 말한 역사 발전의 변증법입니다. 그의 사상은 근대 역사철학의 핵심인 진보 이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근대 역사 이론가들은 인간이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사회를 조직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곧 진보로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세상이 실제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고 설명 가능하며 예측할 수 있다는 병리적인 사고에 빠졌습니다. 특히 역사에는 변증법 같은 법칙이 있어, 모순이나 대립을 거치며 인류가 점점 발전된 사회로 나아간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무작위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마르크스는 한 세기 반 전 핵심을 짚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원하는 대로 만들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사과 하나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조차 수많은 우연의 결과일 수 있다면, 훨씬 복잡한 인간의 역사가 정해진 경로를 따른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니체가 “역사에 법칙이 있다면, 그 법칙은 아무 의미가 없고, 역사 역시 아무 의미도 없다”고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장기적인 ‘추세’, 이를테면 인구 증가 같은 추세는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세는 ‘법칙’이 아닙니다. 추세는 지속성을 보장하지 않으며, 조건이 변하면 언제든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인구 증가라는 추세는 전쟁이나 질병, 기근, 환경 재난 앞에서 언제든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류는 전진하거나 후퇴할 수 없습니다. 인류는 의도나 목적을 지닌 집합적인 실체가 아니기에, 스스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인류 진보나 발전을 포함한 모든 현상을 목적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이 어떤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는다. 게다가 신이 만물을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했다고 확신한다.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으며, 인간이 신을 숭배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은 어떤 목적도 설정하지 않았다. 목적론적인 설명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진보’라는 목적론이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는 설명할 수 있는 건 필연이고, 설명할 수 없는 건 우연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진보가 필연적이라는 믿음은 역사가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어떤 내재한 법칙에 따라 발전한다는 가정에서 비롯됩니다. 근대 역사철학은 이 필연성을 증명하려 했지만, 결국 헛된 시도에 불과했습니다.
목적론은 모든 걸 쉽게 설명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모든 현상을 목적에 맞춰 해석하면, 결과가 원인이 되는 순환론이나 동어반복에 빠지게 됩니다. 아무리 베일을 벗겨도 또 다른 베일이 나타날 뿐입니다. 세상은 목적을 향해 선형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우연이 축적되며 끊없이 생성되는 흐름입니다. 이는 너무 자명한 사실이라 강조하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입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진보나 발전을 믿는 이들이 이 상식을 잊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연속성에는 시간이 포함되고, 시간은 우연에 지배됩니다. 하지만 진보를 믿는 이들은 이 우연을 배제하고, 주체가 의도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진보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문명의 진보는 우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진보는 새로운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은 또 다른 고통과 이기심, 부도덕을 만들어낸다.” 그는 노동이나 절제, 검약 같은 미덕조차 “세련된 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이를 성경 구절로 요약했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리라.”(<전도서 1:18>)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또한 역사를 진보로 보는 습관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진보는 지속적인 상향 곡선을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큰 재앙을 동반할 가능성이 더 크다. 더 치명적인 세계대전, 생태 재앙, 인간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기술 등, 다양한 악몽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묵시록과도 같은 시대를 겪으며, 이런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이 서로 전쟁을 벌이고,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지 못하며, 동물을 학대하고 식물 생태계를 파괴하는 이 모든 행위는, 인간이 진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고, 더 나아가 멸망을 자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요? 그럼에도 이 시대를 ‘진보의 시대’라 부른다면, 이 시대를 주도하는 부르주아가 곧 진보의 담지자가 됩니다. 결국 진보란, 그들이 만들어낸 세속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미래에 모두가 잘 살 거란 진보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현존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철학자 알튀세르(1918~90)는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이라고 했습니다.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갖는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주체로 만듭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면, 해석을 달리하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끝없는 해석만이 존재하며, 새로운 해석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틀을 바꾸어 현상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는 해답은 단순한 사실관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동일한 사실도 어떻게 배열하고 구조화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 그 영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과정은 곧 기존 의미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투쟁이기도 합니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면, 우리는 그 정체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스스로 자유롭고 이성적으로 사고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이미 주어진 인식 틀, 즉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고가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은 그 틀 자체를 성찰하는 깊은 통찰에 달려 있습니다.
불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관’(觀, 위빠사나)을 제시합니다. 관이란 특정한 관점이나 고정된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유연하게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물을 다르게 보는 차원을 넘어서, 보는 나의 인식 구조 자체, 곧 이데올로기 틀에 주목하고 그것을 다시 해석하는 작업입니다. 마음에 주어진 인식 자체가 아니라, 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 자체를 재해석하고 이해하는 게 관의 핵심입니다.
미하일 브루벨 <앉아 있는 악마>(1890)
산등성이에 앉아 슬픈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 아름다운 청년은 ‘악마’입니다. 하지만 그는 악의 상징이 아닙니다. 현실의 한계를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영웅적인 반항아입니다.
19세기말 급속한 산업화와 현대화 속에서 미하일 부르벨 같은 ‘퇴폐주의’ 화가들은 전통적인 가치 체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세계의 모순을 사색하는 ‘악마’의 얼굴에는, 비극적인 세계에 대한 깊은 연민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