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라이즌 연대기 단편모음집
"너에게는 자유가 없다. 우리들의 목적이 너의 목적이며, 너는 오직 그것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두건을 쓴 남자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는 어두운 방 안에서 간신히 숨만 고른 채 누워 있었다.
'싫어. 싫단 말이야. 난 살고 싶어.'
"너에게는 존재이유가 없다. 너는 태초부터 죽어야 할 운명이었으니, 어떻게 쓰이든 상관없다. 너는 모범적인 삶을 살다가, 남의 칭송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남의 칭송과 인정만이 너에게는 유일한 가치가 될 것이다."
연예인들은 한 송이 꽃이 된다고 했었나,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의, 소속사 대표라는 남자는 잔인하게 소녀를 몰아세웠다.
"너의, 의지, 자유 따위란 하찮은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발설되어서도 알려져서도 안 된다. 너는 내가 시키는 일과 사상에 따라야 하며, 나중에 내가 시키는 일을 충실히 수행한 이후에는 대중의 욕망을 충실히 충족시켜야 한다. 네가 감히 자유를 누리겠다고 하면, 너는 영원한 감옥에서 죽지 않은 채 계속 업을 쌓으리라."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너의 의지라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대업 달성에 쓰여야 한다. 너는 우리들의 대업을 위해 충성하는 물건이다. 너의 정신은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 너는 굴복해야 한다. 너는 당연하게 짓밟힐지언정 우리가 베풀어주는 작은 찬사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감탄을 토해야 한다. 감사함을 토해야 한다. 불만 따위는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잘못은 너의 탓이고, 모든 결과나 잘함은 우리의 덕분이다. 그러니, 너는 우리를 숭배해야 한다."
'듣기 싫어. 듣기 싫어. 안 들을거야.'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갑자기 이 사람들의 부하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데려와서는 한 떨기 꽃이 되어야 겠다면서, 강압적으로 가두고 사육하듯 키우는 생활을 시작했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항상 정신적으로는 강제적인 복종을 강요했다.
"우리를 위해 순종적인 눈빛으로 행복하게 무릎을 꿇는 게 기대되는 군."
소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모든 힘을 짜내서
" 웃기지마! 너희들이 날 감옥에 가둔다면, 감옥을 빠져나갈 거고, 그 감옥을 흔적도 없이 부숴버릴거야. 어떤 독재도, 어떤 폭압적인 권위도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어. 내 목표는 하나, 자유로운 세상을 만드는 거야."
쇠를 긁는 목소리는 쿡쿡거리며 말했다.
"오호. 그러신가. 감히 아직 말할 기운이 남아있다니, 인간에게 희망 사랑, 공존이라니. 크크. 웃기는 일이지. 나는 크루거. 희망을 빼앗고 절망만을 주는자. 모든 이를 쳇바퀴의 굴레에 가두어 이 세상을 침묵에 빠뜨리는 자. 너는 불가능할 것이다. 너는 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이루지 못할 것이고, 너는 사라질 것이다. 너는 감옥에 갇힌 것만을 알고 있는 채 고통스럽게 살다가 결국에는 가장 고통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너는 망각의 축복조차 지니지 못한 채 영원히 고통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고통이 진해지고 진해지다가, 너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너의 운명이 될 것이다."
크루거의 목소리는 느릿느릿하면서 쇠를 긁는 것과 같았다.
"무기력과 증오, 회환. 인간에게 행복이나 사랑을 찾기 위해서 헤메이는 고행을 하게 하는 것은 악의 사도인 우리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굴복해라. 오직 굴종만이 달콤한 열매를 맛 볼 수 있으리니..."
크루거는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목소리에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맺혀 있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고저도 없었고, 듣는 이를 미쳐버리게 하는 마성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 속에 살지어다. 모두가 너를 칭송하며 살지어다. 나의 말에 따르면. 너 자신만 희생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너는 영원히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너의 삶 따위는 없다. 너는 욕됨 조차 감사함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때, 뒤에서 공간이 부서지면서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크루거의 가슴에 검은색 장검이 꽃혔다.
"감히, 누, 가. 신성한 의무에 기름을 붓느냐..."
"니네가 그렇게 역겨워하는 인간이다. 사랑과 자유를 갈망하는 자의 검을 받아라!"
"행복과 사랑의 이름으로!"
"구아아악. 언니. 쟤네 잡을 때 꼭 그렇게 해야 해요?"
"응. 기분 좋지 않아?"
"히이익! 오글거려요. 저 미친놈도 싫지만."
"렌. 뽀뽀해 줄까?"
"응. 저놈들 속을 뒤집어 놓으려면 사랑이나 자유 행복 같은 플러스 감정이 좋은 거래."
"그오오오오...커플..죽인다..."
금발 머리의 여자가 쪽, 하고 입을 맞추자 크루거는 문어와 오징어서 섞인 모습으로 변해 음습한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흑색의 검이 크루거를 완전히 양단해 버렸다.
"안 돼...안 돼...하지만. 인간을 향한 저주는 영원..."
"레이나. 신성마법."
"네. 오빠."
뒤이어 남자, 카렌의 검에 빛이 어리더니, 검은색 찐득찐득한 물로 변했던 크루거가 비명을 지르면서 사라져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옆에 있던 여자가 정화수를 건넸다.
"린. 이번에는 이거 마시면 뭐가 나올까."
남자, 카렌이 금발의 여성, 세이린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하하. 글쎄."
"포션 먹었더니 달팽이를 토해내는 거는 으윽...끔찍하단 말이야."
카렌은 검을 집어넣고서는 정화 포션을 따서 마셨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온갖 생물들이 다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튀어나온 생물들은 저 멀리 있는 투명한 색도, 바다색도 아닌 이상한 바다에 녹아서 사라졌다.
"에테르 바다에 들어가면 다 녹아서 사라지네."
"여기가 정화의 행성이래. 꽤나 오래 전부터 수행자들도 많이왔었고. 그런데, 우리가 해치웠던 녀석들처럼 난리를 피우는 녀석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나 뭐래나."
"짧았지만 정신건강에 안 좋은 경험 한 거 같아."
세이린은 카렌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저 너머에 코비가 나리크와 함께 오고 있었다.
어쩐지 나리크의 표정이 안좋아보였다.
"쓰으읍. 이딴 오글거리는 의뢰 하자고 한 새끼 누구야! 으으..내가 왜 브로맨스 따윌 찍어야 하는 거야야
! 차라리 코미디나 액션 영화가 훨씬 낫다고!"
"아하하하! 전데요."
세이린이 어색하게 웃자, 카렌이 웃으면서 말했다.
"야. 너는 얘가 호기심쟁이, 장난꾸러기인거 아직도 모르냐. 나도 또 속았어. 그래도 얘랑 같이 다니다 보면 삶의 활력소가 되지 않냐?"
"차라리 호쾌하게 뚜드려패는 의뢰를 소개해달라고 으으윽. 마무리가 역겨워..."
웃고 있는 코비와 다르게 나리크는 학을 떼는 표정이었다.
"얘. 꼬마야. 정신이 들어?"
크루거에서 벗어난 소녀가 작게 눈을 떴다. 그러자 피곤에 지쳐보이지만, 눈이 똘망똘망한 아이가 눈을 떴다.
"우으음..."
눈을 뜨자, 소녀의 눈 앞에 검은 머리의 남자와 금발 머리의 여자, 흑발의 여자, 그리고 안경을 쓴 두 남자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깼나? 깼다."
"...저 구해러 와주신 거에요?"
"응. 이제 집에 가자."
세이린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도, 부모님도 없어요. 다 크루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당해서 죽어버렸는걸요. 살겠다는 의지도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는데..."
"얘야.그럼 새 시작을 해 보는게 어때?"
"새 시작이요?"
"다른 차원에서 새 시작을 하는 거야. 완벽한 평화가 있는 곳은 찾기 힘들겠지만, 여기는 되게 막장에 속해서, 살기가 되게 힘들거든..."
"그럼 갈게요. 대신 제가 여기 잡혀오기 전에 저를 돌봐주셨던 분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응.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소녀는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한 중년 아저씨를 부축했다.
"아저씨..우리 이제 살았어요."
"그..러..냐."
코비가 어딘가로 통하는 차원문을 열자, 둘은 문 너머로 사라졌다.
"해피엔딩이네. 마지막에는."
"오빠. 신성 마법 써드릴까요?기분 좋아지게. "
레이나의 말에 나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나. 나도 써줘. 기분이 좀 다운되서. 렌 형도 그래 보이고..."
"응. 알았어."
죽음의 의문에서 벗어나고, 활력있는 삶을 살기 시작한, 그녀는 손을 펼쳐서 기도를 하더니 모두에게 축복을 내렸다. 그러자 그들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뿌리가 내렸던 검은 마음의 뿌리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내 편안한 표정으로 카렌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코비가 차원을 열어서 전송을 시작하고 있었다.
"와아. 그래도 페이는 짭짤할테니까 좋다. 린 우리 며칠동안 여행갈래?"
"응응. 그러자. 어디가 좋으려나?"
"지구로 돌아가면,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
그들의 아바타는, 호라이즌 대륙을 거쳤다가, 그곳의 숙소에서 잠이 든 다음, 서서히 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왔다.
"이예에! 돈 벌었다. 수아야. 너도 돈 들어왔어?"
"응. 기분 완전 좋아. 헤헤."
"에라이. 나쁜 자식."
"음. 그래도 기분 좋다."
"우리 그럼 ...에서 만날래?"
대화는 잠시동안 이어졌다.
소녀는, 행성에서 속한 어떤 단체에서 구해갔다고 한다. 아마 다른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가 될 것이다. 이 우주에는 다른 차원으로 가면 의외로 살기 좋은 곳이 많으니 말이다. 1우주에 있는 지구 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재민은 수아와 이런 저런 통화를 하고서 끊고서는 활짝 웃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