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저는 자타공인 책 벌레였어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책장 앞에만 서면 시간 가는 줄 몰랐죠. 오죽하면 피아노 학원 갈 시간이 됐는데도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 피아노 가방에 책을 서너 권씩 꾸역꾸역 밀어 넣고 길을 나섰죠. 레슨 순서를 기다리는 그 짧은 틈조차 책 속으로 도망가고 싶을 만큼 책이 정말 재밌었거든요.
사실 저희 집엔 책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옆집 지영이네 집은 완전 보물창고였죠! 지영이네 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았는데, 순전히 책 때문이었어요. 문제는 지영이의 마음이었죠. 지영이는 저랑 인형 놀이를 하고 싶어 했는데, 저는 매일 남의 집 책장만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얼마나 얄미웠겠어요? 아마 속으로 ‘쟤 또 왔네’ 했을지도 몰라요.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어머니께서 큰맘 먹고 전집을 한 세트 사 오셨어요. 당시엔 온라인 서점도 없고 도서관도 드물던 시절이라, 어머니가 직접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가셔서 사 오신 귀한 책들이었죠.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1년에 딱 한 번 허락되는 거금의 선물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럴 수가, 그 책이 저에겐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었지 뭐예요!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도통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그때부터 제 책 읽기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어요. 어머니는 "비싼 돈 들여 사줬더니 왜 안 읽느냐"며 다그치기 시작하셨고, 저는 "재미없단 말이야!"라며 투정을 부렸죠. 책 읽으라는 잔소리가 귀에 박히게 많이 들리게 시작한 게 바로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부모님들, 꼭 기억해 주세요. 아이들에겐 재미가 전부입니다. 재미있으면 하지 말라고 말려도 알아서 합니다. 문제는 재미없는 걸 억지로 시킬 때 생기죠. 순종적인 아이들은 하는 척이라도 하겠지만, 속으로는 그 일을 점점 더 싫어하게 될 거예요. 결국 아이와 부모 사이만 멀어지는 역효과가 나기 십상이죠.
"선생님, 어떤 책을 읽혀야 할까요? 권장도서 목록 좀 알려주세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저, 권장도서 정말 싫어해요." 제 아픈 경험 때문이기도 하지만, 옆집 아이에게 권장도서라고 해서 내 아이에게도 정답은 아니거든요.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해서 관심사와 수준이 같을 순 없잖아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 "이거 올해의 권장도서니까 꼭 읽어!"라며 내 관심사 밖의 두껍고 어려운 책을 들이민다면 어떨까요? "좋은 책인 건 알겠는데, 도저히 소화가 안 돼!"라는 비명이 절로 나오지 않을까요? 100명의 아이가 있다면 100가지의 세상이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에서 추천하는 목록도 매년 바뀌어요. 아이들의 구성과 관심사가 매달, 매년 달라지니까요.
아이가 책을 멀리한다면, 그건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아직 자기만의 재미있는 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해한 내용만 아니라면 만화책이면 어떻고, 그림 위주의 책이면 어떤가요. 아이들에게는 재미가 1순위여야 합니다.
"책 좀 읽어라"라는 잔소리 대신, 아이와 함께 서점에 가서 깔깔거릴 수 있는 책을 같이 찾아봐 주세요. 엄마가 말려도 이불 속에서 플래시 비춰가며 몰래 읽는 재미를 선물해 주세요. 재미만 찾으면 공부는 덤으로 따라옵니다. 하지만 말로만 재촉하면 남는 건 상처 난 관계뿐이랍니다.
교육은 양동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지피는 것이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결국 교육이란 아이라는 양동이에 지식을 들이붓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속에 배움의 불을 지피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말했듯 그 불씨가 당겨지는 순간, 아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테니까요. 만약 지금 우리 아이가 책을 멀리하고 있다면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J.K.롤링도요 "아이가 책을 싫어한다면, 그건 단지 아직 인생의 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고 해요. J.K. 롤링의 말처럼 그건 아이가 책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단지 아직 자기 인생을 바꿀 인생의 책을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운명 같은 책을 만나도록 함께 재미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응원이자 최고의 교육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