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따라쓰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의 자리

by 북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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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자마자 마음이 고요해졌다.

“필사란 누군가의 마음에 새겨 넣는 일, 그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는 것.”

고두현 시인의 문장은, 마치 나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했다.

시를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서 ‘따라 쓴다’는 행위.

이 책 『고두현 따라쓰기 _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은 단순한 필사 노트가 아니라,

언어와 마음의 온도를 되찾게 하는 작은 수행집 같다.


책은 총 다섯 부로 나뉜다.

‘너에게 가는 길’로 시작해, ‘짝사랑’을 지나 ‘내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때’,

‘맹인 안마사의 슬픔’, 그리고 ‘망덕포구에 그가 산다’로 이어진다.

그 안에는 사랑과 그리움, 삶과 노년, 빛과 그림자, 그리고 회복이 있다.

이 78편의 시는 시인의 세월을 따라온 발자국이자,

독자가 그 발자국 위에 손끝으로 마음을 포개어보는 여정이다.


고두현 시인은 말한다.

“시를 필사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내 얼굴을 더듬는 일이요,

빛을 향해 고개를 드는 일이며, 잊고 있던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다.”

이 문장은 이 책의 핵심을 설명한다.

‘따라쓰기’는 타인의 언어를 훔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언어 속에서 ‘나의 언어’를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다.

손끝이 글자를 따라 움직일 때,

그 문장들은 나의 과거를 비추고, 현재의 나를 드러낸다.

시인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이,

내 안에서 ‘이제 막 태어나는 말’로 바뀌는 순간이다.


1부 ‘너에게 가는 길’에는 봄의 빛이 있다.

목련과 편지, 첫사랑, 그리고 봄밤의 부석사까지.

그의 시는 계절의 감촉을 단어로 옮기는 솜씨가 탁월하다.

‘꽃자루에 꽃 하나씩 피는 목련’이라는 구절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기다림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그 기다림은 결국 ‘너에게 가는 길’로 이어지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마음’을 발견한다.


2부 ‘짝사랑’에서는 시인의 감정선이 한층 섬세해진다.

‘별에게 묻다’, ‘목련이 북향으로 피는 까닭’, ‘먼 그대’ 같은 시편은

부재의 정서와 사랑의 인내를 함께 담고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이라는 제목의 시가 이 부에 실린 것도 의미심장하다.

사랑이든, 용서든, 때로는 ‘하지 못한 말’ 속에 가장 깊은 마음이 숨어 있다.

시인은 그 말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는다.

그저 여백을 남긴다.

그 여백이야말로, 독자가 자기의 말을 써 넣을 자리이기 때문이다.


3부와 4부는 인간의 삶과 고통, 그리고 사회적 시선을 담고 있다.

‘내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때’는 존재의 근원을 돌아보게 하고,

‘맹인 안마사의 슬픔’은 보이지 않음의 세계를 빛으로 전환한다.

고두현의 시는 현실의 질감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되, 그것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는다.

슬픔 속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는 시어들.

그게 고두현 문장의 특징이다.


5부 ‘망덕포구에 그가 산다’는 일종의 귀향이다.

삶을 돌아보고, 세월을 받아들이며, 존재의 자리를 확인하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

“몽파르나스 공원묘지”나 “지상에서 천국까지” 같은 제목은

시인이 세상과 자신을 동시에 바라보는 이중적 시선을 보여준다.

마지막 시들은 마치 오래된 친구와의 작별 같다.

그리움을 안고, 그러나 담담히 손을 흔드는 느낌.

그 끝에서 우리는 묘하게도 위로를 받는다.


책의 서문에는 시인이 이렇게 썼다.

“필사의 맛은 천천히, 느리게 하는 데 있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빠른 세상에서,

‘천천히 쓴다’는 행위는 거의 저항에 가깝다.

하루를 잠시 멈추고,

연필을 깎아 한 줄의 시를 베껴 쓰는 동안

세상은 조금 멀어지고, 나의 마음은 가까워진다.

그 느림 속에서 비로소 단어의 숨결을 듣게 된다.


이 책의 아름다움은 완결된 문장보다, ‘여백’에 있다.

각 시 옆에 남겨진 빈 공간은

독자가 직접 손글씨로 시를 따라 쓰며 자신의 호흡을 섞을 수 있게 만든다.

그 여백은 단순한 기록 공간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이 피어날 자리다.

그곳에서 우리는 시인과 나란히 앉아 같은 하늘을 본다.

그가 쓴 단어 위로, 나의 문장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고두현 따라쓰기』는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요즘, 어떤 말을 태어나게 하고 있나요?

다 쓰지 못한 문장,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금 당신의 시가 될지도 모릅니다.

천천히, 한 자씩 써 내려가며

당신 안의 말을 다시 불러내는 일.

그게 어쩌면, 우리가 잊고 지낸 ‘삶의 리듬’ 아닐까요?


당신은 오늘 어떤 문장을 따라 써보고 싶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