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의 문장을 손으로 쓰는 기쁨

- 『이영도 필사노트 Vol.1: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을 쓰다

by 북돌이

손으로 쓰면 문장이 달라진다.


손으로 문장을 따라 적는 일은 늘 더딘 편이다.

생각보다 속도가 붙지 않는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야 비로소 문장이 제 안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최근에 새로 펼친 『이영도 필사노트 Vol.1』은 그 감각을 다시 꺼내 준 책이었다.

책을 펼치면 왼쪽 페이지에는 이영도 작가가 건져 올린 문장이 한 줄 자리하고,

오른쪽은 텅 비어 있다.

이 단순한 구성 속에 묘하게 많은 여백이 들어 있다.

그 첫 페이지의 문장을 옮겨 적었다.

“위로를 싼값에 구하면 슬픔도 싸지지. 그러다 보면 삶에 남는 게 없소.”

짧지만 손끝에서는 묵직하게 변했다.

글씨를 완성하는 동안 문장의 겉면뿐 아니라

뒷면까지 쓰다듬는 기분이 들었다.


왜 Vol.1은 ‘폴라리스 랩소디’였을까

편집부는 수록할 문장을 고르며 꽤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이영도의 책에는 ‘한 줄로도 살아 움직이는 문장’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중 Vol.1을 『폴라리스 랩소디』 중심으로 엮은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작가의 장편 중 연작이 아닌 단독 장편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는 사실.

그래서 먼저 구조가 단단히 완결된 작품을 기반으로

필사노트의 첫 권을 시작했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부제였던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의 그리움”이

Vol.1의 제목이 되었다.

첫 권의 방향이 잡히자

이후 시리즈의 흐름도 함께 정리되었다.

Vol.2 — 드래곤 라자, 퓨처워커, 그림자 자국, 어느 실험실 풍경

→ 제목: 나는 단수가 아니다

Vol.3 —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 제목: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단순한 필사노트가 아니라,

이영도의 세계관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는 구성이라는 걸 알고 나니

처음부터 천천히 밟아가고 싶어졌다.


손으로 쓰면 드러나는 것들

사진을 남기며 필사를 이어가다 보니,

페이지마다 느낌이 조금씩 달라졌다.

문장이 길어질수록 집중이 깊어지고,

조용한 공간에서 종이를 긁는 연필 소리는

슬며시 사고를 정리했다.

연필이 천천히 흐르는 속도만큼

내 마음도 같이 가라앉았다.

노트의 종이는 번짐이 거의 없어

연필과 잘 맞는다.

오래 써도 펼쳐짐이 안정적이라

필사하는 동안 손이 불편하지 않았다.

“경이 전장에서 홀로 서 있을 때 경은 나온 것이 아니다.

경이 나머지 야군 전부를 나오게 한 것이다.”

이 문장을 옮길 때만큼은

손의 속도가 유난히 더뎠다.

단순히 집중 때문이 아니라

문장의 의도, 호흡, 단어 사이에 숨어 있는 온도 같은 게

슬쩍 드러났기 때문이다.


Vol.1부터 천천히

이 필사노트는 문장을 따라 적는 사람에게

작은 ‘정지된 시간’을 건네준다.

그 시간이 조금 더 깊어지면

문장 뒤에 있는 작가의 시선과 호흡도

더 가까워진다.

왜 Vol.1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마 문장을 따라가는 순서가

곧 세계관을 따라가는 순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트를 한 줄씩 채워 나가다 보면

언젠가 Vol.2와 Vol.3도 자연스럽게 손에 들려 있을 것 같다.

손으로 옮겨 적어야만 이해되는 문장이 있다는 걸

오랜만에 또렷하게 느끼고 있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적는 이 시간.


여러분은 요즘 어떤 문장을 손으로 써 보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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