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일은 곧 마음을 돌보는 일

- 식물이 건네는 말에 다시 피어나는 순간

by 북돌이

때때로 나는, 마음이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눌리고, 천천히 지쳐가며

어느 날 문득 더는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는 걸

뒤늦게야 알아차리곤 했다.

그래서일까.

손끝으로라도 나를 붙들어두기 위한 작은 루틴을

늘 찾아 헤매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만난 것이 식물의 문장이었다.

누군가가 자연을 바라보며 남긴 한 줄.

그 문장을 다시 시인이 되살린 또 한 줄.

그리고 그 문장에 마음을 건네듯 해설을 붙인 의사의 이야기.

나는 그 문장들을 조용히 따라 쓰는 동안

어쩐지 내 안의 무언가가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느꼈다.


쉽게 말하면,

필사는 나를 잠시 멈추게 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

종이에 손을 얹고 펜을 움직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속도를 늦추는 경험이다.

글자를 쓰기 위해 멈추고

다시 호흡을 맞추고

손으로 흘러나온 생각을 눈으로 되돌아보는 그 시간은

그저 글자를 쓰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특히 자연을 담은 문장들은

내 마음의 가장 낮은 곳,

말하자면 깊은 물 밑에 쌓여 있던 감정들을

슬며시 건드렸다.

한 그루의 나무가 계절을 견디는 모습을 상상하면

내가 버티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였고

도시의 작은 화분이 해를 향해 몸을 비트는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의 나도 아주 미세하게나마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상상은 누군가 적어둔 문장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이 책을 펼칠 때마다

오드리 헵번이 사랑했던 숲의 공기,

이효리가 말하던 자연의 자유로움,

피카소가 그렸던 초록,

루소가 꿈꾸던 숲의 기운들이

한 페이지에 스며드는 느낌을 받았다.

각기 다른 시대,

각기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자연 앞에서는 모두 같은 마음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바라본 자연의 단순함 속에서

삶의 복잡함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신주현 시인이 그들의 말을 다시 쓴 문장을 따라 쓰면

그 문장의 온도가 손끝으로 옮겨오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문장을 정신과 의사가 다시 풀어 설명하면

글자가 감정의 구조로 바뀌는 것 같다.

그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너무 깊이 내려가지 않고도

은근히 들여다볼 수 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 책이 문장을 통해 나를 다독이는 동시에

실제로 저자가 일상에서 마주한 자연의 순간들을

조용히 들려준다는 점이었다.

나무 한 그루 앞에서 멈춰 선 이야기,

도시 공원에서 피어난 작은 꽃을 보고 적어둔 고백,

계절을 따라 움직이는 식물의 변화를 포착한 시선들.

이 순간들은

누군가의 눈으로 본 자연이지만

어쩐지 내 마음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사실 나는 자주 지친 마음을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라

입 안에서만 굴리다 삼키곤 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문장을 따라 쓰는 순간엔

내 마음도 그 문장의 리듬을 타고

조금씩 표면 위로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필사를 오래 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식물의 언어는

그리 요란하지 않다.

크게 울리지도 않고

화려하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흙 아래에서 뿌리를 뻗는 것처럼

천천히 나를 감싸안을 뿐이다.

어쩌면 위로라는 건

이렇게 소리 없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디지털의 속도가 나를 흔들 때

나는 종이에 펜을 눌러

하나의 문장을 천천히 따라 쓴다.

그 문장이 오늘의 숨을 잠시 붙잡아 주고

내일의 마음을 조금 정돈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안의 초록이 다시 피어나는 경험을 했다.


당신은 어떨까.

요즘 당신의 마음을 천천히 붙잡아 주는 문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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