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화원에서 멈춰 선 마음

- 온다 리쿠의 세계 앞에서

by 북돌이

소녀가 세계를 처음 의심하던 때

나는 어떤 이야기 앞에 서면 문득,

나도 모르게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건 주로 세계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이야기,

현실이 조금씩 틀어져 보이는 이야기들에서 일어난다.

온다 리쿠의 리세 시리즈는 늘 그런 식으로 나를 붙잡는다.

특히 새벽의 화원에 깃든 공기는 밤과 아침이 스치는 경계처럼 얇고 투명하다.

읽는 동안 나는 자꾸 어린 리세를 떠올렸다.

세계가 단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 인지하던 나의 어린 시절과 이상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우리라는 말의 잔혹함

책 속 기숙학교는 ‘요람’, ‘양성소’, ‘묘지’라는

이름을 가진 세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이 분류는 듣기만 해도 온기가 아닌,

정교하게 가공된 차가움을 떠올리게 한다.


보호받기 위해 갇힌 아이,

기능을 위해 길러지는 아이,

그리고 존재를 숨기라는 아이.


나는 이 구조를 읽을 때마다 ‘아름다운 우리’라는 표현이

얼마나 잔혹한지 자꾸 되새기게 된다.

겉으로는 호화롭고 정돈되어 있지만,

그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고요하게 스며 있다.


사람은 언제나 거대한 틀 안에서 길들여지고,

익숙함은 곧 감각을 흐린다.

그런데 그 익숙함 속에는 늘 작은 금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리세 시리즈는 은밀하게 알려준다.


익숙함과 위화감 사이에서

리세의 어린 시절을 그린 수련 편을 읽을 때

나는 오래전에 잊힌 감각을 떠올렸다.


혼자 있는 시간이 싫지 않았던 날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규칙처럼 들리던 순간들.

나는 어릴 때 조용한 공간을 좋아했다.


그 속에서는 불필요한 설명 없이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리세가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고, 레코드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던 모습이 마치 나의 오래된 방에서 흘러나온 기억처럼 겹쳐졌다.


혼자라는 건 늘 고독과 편안함을 동시에 데려오는 감정이었다.


불온한 기척이 열어놓은 문

수정의 밤, 비취의 아침에서 종이 인형 장난이 유행하는 장면을 읽을 때,

나는 작은 사물이 만드는 기묘한 불편함을 다시 떠올렸다.


누가 두고 갔는지 모르는 작은 모양 하나가

공간 전체의 공기를 바꿔버리는 순간.

리세 시리즈에서 이런 장치는 늘

세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예고편처럼 등장한다.


설명할 수 없는 불온함은 마음을 휘저으며,

그 순간 읽는 이는 비로소 어떤 진실의 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그 문턱에서 늘 잠시 멈춰 앉게 된다.

어쩌면 불편함은, 진실이 가까워졌다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비밀이 만든 어둠

보리의 바다에 뜬 우리에서 드러나는

교장의 과거는 시리즈 전체에 흐르는 공기와 닮아 있다.


겉은 화려하고 우아하지만,

내부에는 오래된 독이 숨겨져 있는 구조.

비밀은 대부분 조용한 공간에 스며든다.


서랍 속에 감춰둔 유리병,

지나간 시간의 그림자 같은 물건,

누군가의 시선이 오래 닿아 있던 책상.

온다 리쿠의 세계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의미의 조각들로 작동한다.


나는 그 조각을 하나씩 맞춰보는 과정이 좋다.

완전히 드러난 진실보다,

드러나기 직전의 흐릿한 형태가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달이 사라진 밤에야 보이는 것들

월식 편에서, 달이 완전히 가려진 밤하늘 아래를 걸으며

히지리가 느끼던 기묘한 불안은

어른이 되고 난 후에 알게 된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때로는 하나의 빛이 완전히 사라져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동안 외면했던 기척, 숨기던 표정,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한 균열.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종종 잔인하지만,

동시에 예리한 빛을 가진다.


리세 시리즈의 밤은 늘 그렇게 이야기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사라진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를 향해 흘러가는 배처럼

언덕을 가는 배에서 그려지는 레이지와 레이코의 과거는,

오래 비워진 퍼즐 조각 하나가

제자리를 찾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마음에는 목적지 없이 흘러가는 감정과,

누군가를 향해 조용히 움직이는 감정이 함께 살고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 사이 어딘가를 천천히 건너며,

리세 시리즈의 세계를 더 넓고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감정 하나를 떠올렸다.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이유를 지닌 감정,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던 그 무게.

어떤 이야기는 그 무게를 다시 손끝에 올려놓게 한다.


리세가 세계를 다시 배우던 순간

백합장에 머물던 시절은

리세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던 기억일지도 모른다.

감정은 늘 가장 조용한 곳에서 자란다.


백합이 가득한 복도에서,

리세는 처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의 그림자를 느꼈을 것이다.

시리즈를 따라가다 보면,

리세가 왜 늘 세계의 균열을 먼저 발견하는 인물이 되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 어린 시절의 작은 감정들이 앞으로의 리세를 만들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낯선 호텔에서 마주한 현실

그림 없는 그림책에서,

리세가 외국 호텔에서 사건에 휘말리는 장면을 읽으며

나는 어른이 된 이후 느끼게 된 두려움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일 때 세계는 단순했고,

어른이 되면 세계는 설명할 수 없는 방향으로 펼쳐졌다.

그 사이의 공백에서 나는 종종 길을 잃었다.


리세가 그 낯선 공간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선택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세계가 나를 가두기도 하고,

나를 밀어내기도 하며,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쳐버리기도 한다.


새벽의 화원이 말해준 것

결국 새벽의 화원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세우는 소설이었다.


리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 있었고,

그 경계에서 길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워왔다.


나는 그 아이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문득 깨닫는다.

성장이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나의 세계를 조금씩 정리해 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언제나 약간의 어둠을 품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어둠에 머무는 시간이 아니라,

그 어둠을 바라보는 태도라는 것.

리세는 늘 그 태도를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첫 장을 펼친다

이 시리즈를 읽으며 나는 종종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다.

나 역시 나만의 ‘우리’에서 자라며,

스스로 그 문을 열기 위해 오래 걸렸다는 사실을.


온다 리쿠의 세계는 그 기억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대신 조용한 목소리로 비춘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쯤을 걷고 있느냐고.

너의 세계는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느냐고.


당신은 이 책 앞에서 어떤 오래된 감정을 떠올리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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