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줄 말은, 손끝에서 자란다

- 메마른 하루에 시를 적어 넣는 일

by 북돌이

-도서 줄거리 요약

이 책은 한국 시와 세계 시에서 74편을 엄선해

필사할 수 있도록 구성된 명시 필사책이다.

각 시에는 시인의 언어가 가진 정서와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하도록 돕는 짧은 해설과 이야기가 곁들여져 있다.

1부는 우리 시를, 2부는 세계의 시를 중심으로

사랑과 삶, 그리움과 위로의 주제를 폭넓게 다룬다.

독자는 한 줄씩 옮겨 적는 과정을 통해 감정을 정돈하고,

자신만의 언어를 다시 길어 올리도록 안내받는다.




어느 날은, 내 마음이 너무 빨리 닳아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아침부터 사람을 만나고, 일을 처리하고, 대답하고, 웃고, 또 대답하다 보면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건네야 할 말이 남지 않는다.


괜찮아 라는 말도

고마워 라는 말도

사랑해 라는 말도


입술 끝에서 미끄러져 내리기만 하고

마음까지 도착하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지는 날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펜을 든다.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숨을 한 번 더 길게 쉬기 위한 작은 방법이다.


종이 위에 쓰는 말은 이상하게도 서두르지 않는다.

한 글자를 쓰는 동안, 나는 그 글자만큼 속도를 늦춘다.

마음이 먼저 달려가 버리지 못하게

손끝이 나를 붙잡아 주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을 펼치면, 빈칸이 먼저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옆에 시가 있다.


읽을 때는 아름답다로 끝나던 문장이

옮겨 적는 순간에는, 내 삶의 표정으로 바뀐다.

시인의 시간이 내 손목을 지나

오늘의 내 하루로 번역되는 것 같다.


한 줄을 따라 쓰다가

문득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 내가 지금 이 말을 필요로 했구나.



-말을 건네는 연습은, 나를 다독이는 일

누구에게든 따뜻한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그런 사람은 타고난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천천히 읽어보면

따뜻함은 성격이 아니라 연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말은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마음은 늘 제때 말을 꺼내주지 않으니까.


나는 자주 늦는다.

미안하다는 말을 놓치고

괜찮냐는 질문을 잊고

잘 잤냐는 안부를 미루다

어느새 또 하루가 끝난다.


그럴 때 필사는

놓쳐버린 말들을 다시 줍는 일 같다.

나를 위해 먼저 연습하고

그다음에 누군가에게 건네는 것.



시를 쓰는 동안, 머릿속 소음이 조금씩 줄어든다.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걱정의 목소리가 잠깐 낮아진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시가 나를 강하게 만들기보다

부드럽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부드러움은 쉽게 무너지는 게 아니라

쉽게 날카로워지지 않는 힘이라는 걸

나는 요즘에서야 배운다.



-한 편의 시가 하루를 정돈하는 방식

어떤 날은 윤동주의 문장을 따라 쓰며

내 안의 소란을 맑은 물에 헹구는 기분이 든다.


어떤 날은 김소월의 정서를 옮겨 적다가

오래된 그리움이 고개를 든다.

그리움이란 게 꼭 슬픔만은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된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증거니까.


또 어떤 날은 낯선 이름의 시인을 만나며

내 감정에도 다른 언어의 창이 생기는 것 같다.

사랑을 말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르고

인생을 바라보는 각도가 이렇게 다양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안심시킨다.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이 마음은 너무 특별해서 외로운 게 아니라

너무 흔해서, 누구나 시를 쓰게 되는 거였구나.



필사 노트 한 장을 채우고 나면

나는 조금 더 단정해진 사람이 된다.


말을 고르는 손이 생기고

상처를 덜 주는 숨이 생기고

다정함을 미루지 않는 용기가 아주 조금 생긴다.


그리고 가끔은

가장 먼저 내게 말해본다.


오늘도 잘 버텼다.

오늘은 충분했다.

내일은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



결국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시가 아니라, 말의 온도를 되찾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살리는 말은

대단한 문장이 아니라

자주, 진심으로, 제때 도착하는 말이라는 걸

손끝으로 배웠다.


오늘 당신은

누구에게 어떤 말을, 조용히 연습해보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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