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oke Jul 08. 2020

아빠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부모님의 죽음을 그려본 적이 있는가. 어릴 적부터 감수성이 풍부했던 나는 tv 속에서 주인공이든 악역이든 누군가가 죽기만 하면 오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나였으니 29살인 지금도 엄마가 언젠가 죽을 거라는 생각만 해도, 아니, '엄마의 죽음'을 발음하기만 해도 눈물이 줄줄 흐른다. 그런 내가 아빠의 죽음은 눈물 없이도 선명히 그릴 수 있다. 침착하게, 여러 번 곱씹어가며 상상해봤다.


세상이 좋아졌으니 아빠가 길 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아빠는 병원에서 예고된 죽음을 맞겠지. 아빠의 병실 침대 주위엔 아마도 나와 동생과 엄마가 있을 것이다. 아빠가 평생토록 우리 가족보다 더 의지했던 아빠의 가족들, 이를테면 큰아빠나 고모들이 그 자리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아빠는 숨을 헐떡거릴 수도 있고, 의식을 잃고 이미 죽은 자의 몸을 하고서 평온한 얼굴로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모습이든 상관은 없다. 다만 아빠가 죽기 전, 꼭 해야 할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빠가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기 전에.

난 아빠에게 꼭 물어야 할 말과, 꼭 들어야 할 말이 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아직도 생생하게 서늘한 그 날. 평생 잊지 못할 그 날. 출근한 줄 알았던 아빠는 그 날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 날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엄마는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었다. 나와 동생을 잘 키워보겠다고 좋은 직장을 진작에 그만뒀었던 엄마를 믿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보다도 10cm나 작고 10kg이나 가벼운 그녀에게 가장으로써의 짐을 모두 떠넘길 수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짜리 장녀였던 나는 하루아침에 (예비) 가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물론 아빠는 그 전에도 있으나 마나 한 가장이긴 했다. 아빠와의 기억이 시작되는 7살부터, 아빠와의 기억이 끊기는 17살까지. 약 10년간 겪은 아빠는 '아빠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빠가 집을 나가고 처음에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별 도움도 안 되는데 서로 부대끼며 괴로운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빠는 아빠였고 가장은 가장이었나 보다. 그 날부터 우리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가난을 체험할 때 가장 먼저 피부에 와 닿는 변화는 주거공간의 변화이다. 나름 중산층, 30평대 아파트에 살았던 우리 셋은 17평 거실 하나, 방 하나짜리 비좁은 아파트에서 웅크리고 살게 됐다. 곧 고3이 된 나는 집에서 공부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학교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주말엔 6시면 문을 닫아 다들 집으로 가서 마저 공부를 했으나, 나는 공부할 수 있는 집이 없었다. 6시 퇴실 시간이 지날 때까지 당직 선생님 몰래 숨어있다가, 선생님이 가시면 다시 불을 켜고 공부를 했다. 나의 고3 시절은 장발장이었다. 그렇게 좁은 아파트였어도 나중엔 그마저도 그립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이사 간 곳은 빌라였고, 그다음은 반지하였으니 말이다.


기억나는 이사만 해도 10번이다. 내 등기부등본을 떼면 5페이지가 넘게 나온다. 포장이사를 할 돈마저 궁색했던 엄마는 꼭 트럭만 빌렸다. 그 말은 곧, 모든 짐을 우리가 옮겨야 했다는 말이다. 작은 여자 둘이서 끙끙대며 산더미만 한 이삿짐을 나르던 기억은 가난이 겪게 한 최고의 부끄러움 중 하나이다. 가난 에피소드를 늘어놓자면 하루를 꼬박 세어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게 집을 나간 아빠 덕분에. 그 후의 10년을 말도 못 할 가난 속에서 허덕였다. 가난뿐이겠는가. 남편을 잃은 아내는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에 정신이 없었고, 아빠를 잃은 아들은 하루하루를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다. 정신없는 엄마와 방황하는 동생 사이에서 아빠를 잃은 장녀는, 조만간 자신이 가장이 될 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지지리 궁상을 떨며 그렇게 여태 살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아빠. 그 시점에서 물어야 할 말과 들어야 할 대답.


" 아빠, 그때 왜 그랬어? 아빠도 살려고 그랬어?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될지 몰랐어? 혹시 알고도 그랬어? "


탓하는 건 아니다. 탓하는 마음도 세월에 지쳐 무뎌졌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벗어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묻고 싶다.


" 그러고 나서 아빠는 어떻게 살았어?

아빠도 우리처럼 지독하게 가난하고 힘들었어?

혹시 후회한 적 있어?   어디서부터 후회했어?

우리한테 미안한 적 있어?   어디서부터 미안했어?


다시 그 날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


아빠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세상에서의 가장 마지막 말. 내가 기억할 아빠의 생애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으면 좋겠다.


"미안했다."


"사랑했다" 보다도 듣고 싶은 말. 미안했다는 말.

고생시켜서 미안했다는 말. 곁에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다는 말.

안 해도 되는 걱정들을 떠안게 만들어 미안했다는 말.

딸들이 '아빠'를 떠올릴 때 의례 느끼는 그 감정을 알지 못하게 해서 미안했다는 말.

'딸바보'라는 말 앞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해 미안했다는 말.

'아빠'하고 발음하기 어색하게 만들어 미안했다는 말.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의견을 보태주지 못해 미안했다는 말.

늦은 귀갓길에 손 잡고 마중 나가지 못해 미안했다는 말.

나를 꼭 닮았던 네가 점점 엄마를 닮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해 미안했다는 말.


미안했다는 말.

이제 눈물이 샘솟는다. 아빠의 죽음 앞에서도 굳게 닫혔던 눈물샘이.

미안했다는 말이 포함된 아빠의 죽음 앞에서 나는 펑펑 목놓아 울 수 있을 것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