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커플의 뚜벅이 여행기
나와 독자분들의 열렬한? 응원에 힘입은 남자 친구는 취준생에서 업그레이드되어, '최종 발표를 기다리는 취준생'이 되었다. 최종 합격으로 발표가 나면 당장 다음 주부터 입사를 해야 했기에, '취준생과의 마지막 데이트'가 될지 모를 이번 주말에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고 싶어 졌다. 우리 뚜벅이 여행 가자.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만으로 여행하는 여행자들을 일컬어 '뚜벅이'라고들 한다. 내가 느끼는 뚜벅이라는 단어에는 불편함이 내포되어 있다. 길 한복판에서서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차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2시간을 돌아가는 것,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 동선이 나오지 않아 여행지 몇 곳을 포기하는 것. 이것들이 지금까지 겪은 (국내) 뚜벅이 여행이었고 이후로 뚜벅이 여행을 기피하게 된 이유였다. 기억 속 마지막 뚜벅이라면 3년 전으로 테이프를 감아야 할 정도였으니 나는 어지간히도 그 불편함이 번거롭고 싫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먼저, "우리 뚜벅이 여행 가자."
고맙게도 남자 친구는 내 말을 참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listen의 의미도 되지만, accept의 의미도 함께다. 죽을 만큼 싫은 게 아니라면, 웬만하면 함께 해주는 감사한 사람. 그는 뚜벅이 여행도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더위 앞에서 맥을 못 추리는 그를 위해 생수 3병을 얼리고, 커피 없이는 생활이 안 되는 나를 위해 아메리카노를 샀다. 일정이 뒤틀리면 언제 식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를 뚜벅이들을 위해 초콜릿 과자 2개도 챙겼다. 추위에 약하니 카디건, 정수리 보호를 위해 모자, 사진 찍어야 하니 삼각대, 여자들의 필수품 파우치, 필요할지 모르니 현금, 보조 배터리까지 챙기고 나니 백팩 바닥이 터질 듯이 두둑하다. 그래, 이게 뚜벅이의 맛이다. 일단 어깨가 무거워야 한다.
가기로 한 곳은 '한국 속 스위스'라 불리는 춘천의 한 목장. 고심 끝에 고른 그곳은 하필 뚜벅이들이 여행하기엔 최악의 장소였다. 춘천역에 내려서도 산속 (아주) 깊은 곳에 있을뿐더러, 그곳까지 사람들을 나르는 버스는 단 한 대, 그마저도 주말엔 딱 하루 3번 운행한다고 했다. 일단 버스 시간에 맞춰 출발하긴 했지만 버스를 놓치거나 시간표가 잘못됐다고 하면 택시를 탈 요량이었다. 비록 택시비 편도 2만 원의 비싼 길이지만 '취준생과의 마지막 데이트'를 위해 그 정도 값은 치를 수 있으니!
그렇게 경춘선 역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하마터면 전철을 놓치고 뚜벅이가 아니라 버럭 여행을 할 뻔했다. 5분 차이로 세이프 한 그의 땀방울을 보며 그래, 이게 뚜벅이의 맛이다. 차를 놓칠까 배가 조마조마해야 한다.
가는 길은 설레었다. 자리를 잘 잡은 덕에 반대편 창가를 통해 강원도의 푸르른 산자락 파노라마를 함께 관람할 수 있었다. 손을 꼭 잡고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는 동안 전철은 순조롭게 우리를 춘천역에 데려다주었다. 그래, 어쩌면 이것도 뚜벅이의 맛이다. 같은 경치를 보고 손잡을 수 있는 것. 같은 장면이 같은 순간에 저장되는 것. 같은 몰입도로 이야기하는 것. 긴장 뒤에는 이완이 꼭 따라오는 것.
그리고 이완 뒤에는 다시 긴장이 시작되는 것이 뚜벅이의 맛이다. 춘천역에 내린 우리는, 그날 버스가 우리의 예상대로 운행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택시비 잔치를 결심하긴 했지만 막상 왕복 4만 원의 택시비를 지출하려니 손이 떨린다. 남자 친구는 곧 입사할 신입사원의 명석함을 발휘해 잔꾀를 부렸다. 일단 자주 다니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 근처까지 가는 것이다. 거기서 택시를 부르면 택시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럴듯한 논리에 수긍한 우리는 버스를 타고 그 근방까지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려 카카오 택시를 부른다. 우리는 지금 길 한 복판에 있다. 보이는 사람이라곤 우리뿐이다. 차도 몇 대 다니지 않는다. 낯설지만 재밌어진다. 한껏 꾸민 서울 남녀를 둘러싼 시골집들, 밭들, 강아지라기보다는 누렁이들. 이 와중에 머리를 굴린 것도 재밌고, 틀어진 계획대로 상황이 척척 돌아가는 것도 재밌다. 그래, 예상 밖의 상황에서 웃긴 것. 그게 또 뚜벅이의 맛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가 없는 우리는 언제 이곳에 다시 올지 모르니, 최선의 결과물(사진)을 얻어 가야만 한다. 원래도 사진충(사진광)인 나는 흥분하여 그에게 '나답지 않게 예쁘게 나온' 사진들을 요구한다. 키도 커 보여야 하고, 휑한 정수리도 가려져야 하고, 날씬해 보여야 하며 무엇보다 '인스타'에 올라온 사진들과 비길 데 없는 그런 사진이어야 한다. 그는 아마추어로써 많은 요구들을 한 컷에 담아내기가 난감하다. 표정이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면 나는 또 왠지 마음이 상한다. '찍어주기 싫은가 보다'하고 멋대로 판단한다. 그는 또 귀신같이 내 토라짐을 포착한다. 나는 이때다 싶어 구구절절 토라짐을 토로한다. 그는 그런 게 아닌데 상처 받는다. 그럼 나는 또 미안해진다. 그렇게 한국의 스위스를 눈앞에 두고 한바탕 다퉜다. 이것도 뚜벅이의 맛인가. 왠지 차를 타고 온 다른 커플들은 하하호호 행복해 보이기만 한다.
그는 셔터를 남들보다 두 배 더 누르는 방향으로 나를 달랬고 그 노력에 힘입어 나도 예민함을 누그러뜨렸다. 이제 다 잊고 춘천 닭갈비를 먹으러 가자. 아까와 같이 택시를 조금 타고 버스를 오래 타서 닭갈비 골목에 이른다. 뚜벅이의 맛이라면 드라이버들은 할 수 없는 음주가 제맛인데, 너무 곯아떨어질까 봐 술은 자제한다. 닭갈비를 배 터지게 먹고 춘천역을 향해 걷는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두 몸을 최대한 겹쳐 초경량 좁은 우산에 욱여넣는다. 아무도 없는 회색 유령도시. 우리만 살아서 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 같은 재미가 느껴진다. 오늘 하루 우왕좌왕 속에서 고생했다는 치하를 담아 살며시 볼에 뽀뽀를 한다. 크~ 닭갈비 냄새가 죽인다. 그는 자신이 닭갈비에 뽀뽀를 하는 건지, 여자 친구에게 뽀뽀를 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라고 했다.
뚜벅이에게는 단 한 가지의 특권이 있는데, 바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숙면을 취할 권리'이다. 차 없는 설움을 푹 자는 혜택으로 푸는 것이다. 뚜벅이를 자처하며 예상치 못한 매운맛을 봤으니, 이제 달콤한 맛을 볼 차례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특권을 포기하고 내내 '뜬 눈'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꿀잠을 자는 동안 기억에서 삭제될 시간이 아까웠던 우리는 이 얘기 저 얘기를 일부러 꺼내며, 서로의 닭갈비 냄새를 맡으며, 잠을 깨겠다고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서울까지 왔다.
뚜벅이 여행은 고되다. 매 순간이 '차가 있었다면 이 고생을 했을까' 하는 물음의 연속이다. 짐은 무겁고 여행지는 멀다. 피로가 쌓인 탓에 쉽게 예민해지기도 하며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대처하기 힘들다.
이 고생스러운 뚜벅이 여행이 어쩐지 계속 생각날 것만 같다. 하루를 빼곡히 채운 온탕과 냉탕의 에피소드들. 좋았다가, 안 좋았다가, 다시 좋아지면서 느껴지는 긴장과 이완감. 뚜벅이 아니었다면 훅 줄어들었을 추억들. 운전하느라 시야에 채울 수밖에 없는 회색 도로 대신, 내 시야를 꽉 채운 생동한 풍경, 그리고 너. 곱씹어 생각해보니 매 순간 고맙고 예뻤던 너.
우리 나중에 차 사도, 가끔은 뚜벅이 하자. 계획대로 흘러가는 매끈한 여행 말고, 가끔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만드는 까칠한 여행도 하자. 믿을 것이 서로밖엔 없는 그 상황에 놓이자. 지치고 예민해져 상처를 주고받더라도. 끝에는 미안함에 애틋해져 헤어질 때 눈물 나는 그런 여행 하자. 우리 나중에 차 사도, 가끔은 뚜벅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