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눈물 버튼과 같은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라라 랜드이다. 지금까지 라라 랜드를 본 횟수는 오늘 아침까지 세면 총 세 번. 그리고 세 번 내리 같은 장면에서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비슷한 양의 눈물을 쏟았다.
나는 라라 랜드가 슬프다. 누군가들은 '꿈을 좇는 용감한 이야기'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꿈을 좇느라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슬프다. 특히 내가 잃어야 하는 대상이 사랑이라면.. 세상에서 내게 이보다 슬픈 이야기는 또 없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잃는 것이 사랑이라면 차라리 덜 얻고 덜 잃기를. 꿈을 이루는 것만큼이나 사랑을 이루는 것 또한 중요한 나에게 라라 랜드의 결말은 충격이었다. 꿈을 좇다가 멀어져 버린 사랑... 그것도 사랑이야? 결국엔 놓쳐버리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냐고! 그럼에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결말이 지독하게도 사실적이게 현실을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겠구나... 우리의 결말도 그들과 같을까 두려운 마음이 방울방울 눈물로 맺힌다.
지난 봄, 하마터면 라라 랜드에 갈 뻔한 우리가 아찔하게 떠올랐다.
"우리, 내년 봄까지 못 만날 것 같아."
"뭐...? 왜...?"
"다시 공무원 준비하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내 꿈이야.
꿈을 이루지 못하면 나는 스스로를 영영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라일락 향기가 아파트 담벼락을 서서히 물들이던 지난 봄, 추위가 가시지 않아 코끝이 시큰했던 늦은 밤. 너는 굳이 먼 거리를 달려 우리 집 앞까지 와서는 저런 말을 했다. 물론 우리가 다른 일로 다투기는 했지만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면 풀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너의 첫마디가 "우리 당분간 못 만날 것 같아." 라니. 너무 뚱딴지같아서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조마조마한 걱정이 들기 시작할 무렵, 너는 그 이유가 공무원 준비를 계속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4년을 도전했다가 안되어 취준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다시 공무원 준비라니. 가슴에서 천둥이 내려쳤다. 쿠루루 쾅쾅!!!!! '공무원 준비가 뭐?'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만, 연인 사이에서의 오랜 공무원 준비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우리가 함께한 지 9년. 그중 2년은 군대를, 4년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기다렸다. 총 6년을. 누가? 내가. 내가. 내가. 그래, 너의 간절한 부탁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나의 의지로 기다렸기에 크게 할 말은 없다. 난 정말 라라 랜드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꿈을 좇는 너를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네가 꿈을 움켜 잡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 옆에 내가 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라라 랜드로 가지 않아도 좋을 거야. 그러니 나도 힘을 낼게.
6년을 숨죽이며 '기다렸'지만, 네 꿈을 실현할 시간을 함께 견뎠지만, 안타깝게도 손에 잡히는 결과가 없었다. 너는 꿈에 더 가까워졌을까? 우리는 라라 랜드에서 좀 멀어졌을까? 한계를 느낀 너는 취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쪽이 더 가능성 있어 보였던 나는 내심 좋았다. 비록 네 꿈은 아니지만, 네 꿈을 비슷하게 펼칠 수 있는 회사가 분명히 있을 거야. 잘 생각했어! 그러던 와중에 다시 리턴이다. 다시 원점이다. 결국 꿈을 좇아야만 하는 너와, 너를 놓지 않기 위해 기다려야만 하는 내가 남았다. 아니, 더는 못 기다리겠는 내가 남았다. 너도 너지만 나도 살아야겠기에. 기다림 속에서 더는 숨 쉬지 못하는 내가 남았다.
‘내가 지난 4년은 어떻게 기다렸더라?’
너의 결심을 들으며 지난 4년간 버텼던 메마른 일상들을 떠올려봤다. 데이트는커녕 2주에 한 번쯤 겨우 만나 같이 먹는 저녁. 속상한 일이 생겨도 신경 쓰지 말라고 일부러 아무 일 없는 척 받는 전화. 혼자 보내는 주말, 기념일과 생일 그리고 잃어버린 계절. 그때만 생각하면 입 속에 사막이 펼쳐진 듯 목이 바짝바짝 탄다. 너는 내게 물인데. 물을 기다리는 사막. 더 이상의 사막은 용납할 수 없다.
"나보고 더 기다려달라고...? 나 이제 더는 못 기다려...
이제 기다리는 거는 치가 떨려...
우리에게 내년 봄은 없어. 지금이야. 헤어질 거면 지금이라고."
라라 랜드가 코앞에 있다. 꿈을 좇아야 하는 너와 꿈을 좇는 너를 더 이상 좇을 수 없는 나. 이게 결말이구나. 현실이구나. 현실 앞에서 사랑은 이렇게나 의미가 없구나. 나의 9년이 이렇게 허무하게 져물어간다.
"너는 공무원 되면 좋을 것 같지? 그 옆에 내가 없어도 좋을 것 같아? 너는 꿈만 이루면 다야? 여자 잘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꿈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어! 네가 나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너 없는 미래는 그릴 수가 없는데, 너 진짜 나빠."
억울함과 함께 무너지는 마음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쩌렁쩌렁 울린다. 우리의 끝이구나. 우리는 다를 줄 알았는데 9년 만에 끝이 왔구나.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끝이 이러했구나. 네 꿈을 응원한 결과가 이렇다니. 참 허무하다. 화도 난다.
"그래, 헤어져. 우리는 여기 까지였나 보다." 하고 집에 올라가 너의 흔적들을 몽땅 쓸어 담았다. 군대 시절 받았던 200여 통의 편지 뭉텅이, 같이 만든 인형, 받은 인형들 그리고 반지. 이별을 힘들게 할 만한 것들은 눈에 보이는 족족 싸들고 내려가니 벤치에 주저앉아 위아래로 떨고 있는 네 어깨가 보인다.
너는 나를 만나는 9년간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나에게 어떤 슬픈 일이 닥쳐도,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눈물만큼은 완벽 수비했던 네가 온몸을 떨며 눈물을 쏟고 있다. 너도 이제 실감하는 거니. 서로의 미래에 없을 서로를. 라라 랜드의 결말을. 라라 랜드가 되어버린 우리를.
그렇게 아파트 놀이터에서 울고 무너지고 소리쳤던 지난봄. 라일락 향기가 은은했던 그 봄. 그 따가웠던 봄을 지나고 매미 소리 반가운 여름, 너는 취업에 성공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서럽게 울던 너는 이별 앞에서 사랑을 다시 생각해보았고, 우리의 사랑이, 결혼이 마침내 '꿈'이었음을 깨달아주었다. 고맙게도 너는 한 발 양보해주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현실과의 타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비록 공무원은 되지 못했지만, 공무원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아직까지는 만족하며 회사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나는 너를 조금만 더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고 우리는 라라 랜드를 가까스로 비껴갔다. 라라 랜드의 문 앞에서 뒤 돌았다. 딱 한 걸음만 더 내디자. 라라 랜드 말고, 서로에게 가자.
꿈과 사랑. 삶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두 가치가 상충해야만 하는 현실은 참 잔인하다. 꿈도 이루고 사랑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욕심 많은 나는 둘 중 하나를 버릴 수가 없다. 우리, 사랑을 이루는 게 꿈인 걸로 하자. 그러면 사랑도 이루어야 꿈을 다 이루는 거야. 꿈을 좇듯이 사랑도 좇자.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내자. 타협하는게 나쁘다고 누가 그래? 타협하는것보다 더 나쁜건 둘 중 하나를 버리는거야. 우리 끝까지 같이 가자. 끊임없이 타협하자.
수많은 라라 랜드가 우리를 환영한대도 우리끼리 랄랄라 랜드에서 놀자.
우리는 지금 랄랄라 랜드에서 나름대로 행복하다.
(영화 라라 랜드에 대한 해석은 주관적이므로 개인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