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28일차)
너무 기분 좋은 아침 기상이었다. 저절로 눈이 떠졌고 피로감이 제로인 상태. 시계를 확인하니 이미 9시가 넘어 있었다. 어린 시절 태양에 비춰보며 놀던 빠알간 셀로판지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옅은 붉은색이 방안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창문에 드리워진 붉은색 커튼을 기어이 뚫고 들어온 햇빛 탓이었다. 커튼을 걷어 확인해보지 않아도 오늘의 태양이 얼마나 강렬한지 짐작이 갔다. 누운 채로 꼰 다리 한쪽을 까딱거리며 한참을 빈둥거렸다. 한 달가량의 이탈리아 여행기간을 군대 복무기간으로 치자면 이젠 말년병장 수준이었기에 기상 시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조식을 먹고 우리가 로마에서 제일 좋아하는 길을 한 번 더 걸으러 가자는 것 외에는 정해진 계획도 없었기에 더 여유로운 날이었다.
(2023년 4월 28일 금요일)
기지개를 늦게 켰으니 루프탑에 올라가는 시간도 자연히 뒤로 밀렸다. 조식이 거의 끝나가는 시간이라 예상대로 사람들이 없어 한산했다. 오늘도 새파란 하늘과 상쾌한 공기가 우리의 남은 잠을 기분 좋게 깨워주었다. 간소하게 조식을 먹고 씻기 위해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외출 전에 오늘의 계획을 간단하게 정리해 봤다.
(이미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사회와 중년생이 가장 좋아하는 길은 다름 아닌 임페리알리 거리(Via dei fori imperiali)였다. 웅장한 콜로세움부터 새하얀 웨딩 케이크(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의 별칭)까지 이어지는 탁 트인 길. 양 옆으로 포로 로마노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거리였다. 4월 초에 로마에서 베네치아로 떠나던 날, 로마에 돌아오면 꼭 다시 걷자고 약속했었고 실제로 며칠 전 다시 오자마자 가볍게 걷기도 했다. “근데 거기는 저녁에 해 질 때 가야 좋지 않을까?” 탁 트인 탓에 대낮엔 해를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는지 사회가 타당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안 가본 코스로 산책 갔다 와서 점심 먹고 쉬다가 거긴 저녁에 가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중년생이 새 의견을 제시했다. 중년생이 말한 ‘안 가본 코스’란 포폴로 광장 쪽으로 가서 핀초 언덕에 올라 잠시 전망을 즐기고, 보르게세 공원을 가로질러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드디어 길을 나서는 두 사람. 시간은 이미 오전 11시를 지난 상태였고, 이미 한낮만큼 뜨거운 해가 밖을 점령하고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을 피해 하는 수 없이 골목길을 찾아 들어선 그때, 어딘가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수많은 관광객들과 마주쳤다. 카메라 렌즈가 일제히 가리키는 곳엔 말을 탄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복장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옛 로마군의 행렬을 재현하는 행사 같았다. 위풍당당한 모습이 멋져서 우리도 관광객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몇 번 셔터를 눌렀다. 갑자기 덕수궁 앞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할 때 열심히 셔터를 누르던 해외 관광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행자의 시선을 장착하고 덕수궁을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포폴로 광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Trinita dei Monti)이 나타났다. 이 성당 앞쪽 광장에는 하늘을 뚫고 올라갈 듯 뾰족한 살루스티안 오벨리스크(Obelisco Sallustiano)가 서 있고, 그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길게 펼쳐져 있는데 여기가 바로 스페인 계단이었다. 아래 길로 왔을 때는 몰랐는데 계단의 위쪽과 연결된 길로 진입해 보니 갑자기 탁 트이는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계단은 4월 초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가득했고, 그때와는 다르게 짙은 분홍색 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냥 지나쳐 가려다가 햇살을 머금은 꽃이 너무 아름답게 피어 있어서 잠시 콧바람을 쐬듯 아주 천천히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이다음은 코스가 아주 간단했다. 스페인 광장에서 포폴로 광장으로 연결되는 바부이노 거리(Via del babuino)를 따라 쭉 걷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고급스러운 느낌의 상점들을 지나 얼마간 걷자 광장이 나타났다. 중앙에 높은 오벨리스크가 서 있고 그 하단이 분수(Fontana dei Leoni)로 되어있었다. 정말 멋진 광장이었지만 이 당시는 탄성은 나오지 않았다. 이유인즉슨, 광장 여기저기서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라 어수선했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이 컸다. ‘Hello giallo’(반가워 옐로!) 오벨리스크 너머 벽에 크게 걸린 아이폰 옐로 버전 출시 광고의 언어유희를 보니, 유치하게도 공사 중인 포폴로 광장에 ‘옐로카드’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바로 옆 핀초 언덕에 오르기로 했다. 오르는 중간에 유료 화장실이 있어서 한 번씩 이용하고 나니 사회와 중년생 둘 다 기분이 확 좋아짐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어수선했던 기분은 보수 공사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 장 속의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핀초 언덕에 올라 아까의 공사 현장을 내려다봤다. 언덕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도 광장을 중심으로 세 방향으로 쭉 뻗은 길을 따라 로마 시내의 전경이 아주 멀리까지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나라처럼 시야를 가리는 너무 높은 건물이 없어서 인 듯했다. ‘이건 너무 부럽네.’ 중년생의 속마음이 중년생에게 진솔하게 말했다. 펼쳐진 로마 시내 전경 앞에서 공사 현장은 너무 작은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어졌다.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두 사람은 한참을 감상하다가 뒤를 돌아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보르게세 공원(Villa Borghese)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풀과 나무의 영역이었다. 로마에서 가장 큰 공원답게 구글맵으로만 봐도 압도적인 규모가 느껴졌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제대로 걸어보기도 전에 지치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사회와 중년생은 저녁 산책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동선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포폴로 광장 쪽 입구에서 우리 호텔 방향인 남동쪽 출구로 연결된 길을 따라가는 코스. 사실 코스랄 것도 없었다. 그냥 거대한 공원을 빠져나가는 지름길을 선택했다고 보면 맞았다. 공원 안에 있는 보르게세 미술관도 상당히 크고 유명해서(이탈리아에서 바티칸 다음으로 소장품이 많다고 한다) 관람하고 싶었지만 예약도 하지 못했고, 오늘의 주 계획은 임페리알리 거리에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체력을 아껴야만 했다.
그런데도 멋진 아우라가 느껴졌다. 공원의 한쪽 가장자리에 발만 담그고 나오는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우거진 나무와 잘 다듬어진 정원, 우아한 분수, 신화에 나올법한 시계 등 눈을 사로잡는 볼거리와 공원 특유의 여유로움이 가득 느껴져서 체력과 시간만 있다면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다. 나중에 꼭 다시 오리라! 지킬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하지만 이미 생겨버린, 하나의 새로운 목표를 가슴에 품고 우리는 잠깐이지만 강렬했던 공원을 뒤로했다.
나서자마자 바로 이어진 역 S자 형태의 긴 도로가 나타났다. 휘어있는 도로를 따라 멋진 가로수 뒤로 고급스럽고 분위기 있는 건물들이 쭉- 이어져 있었다. 심상치 않아 찾아보니 이 길은 베네토 거리(Via vittorio veneto)로 불리고 있었다. 호텔과 카페, 은행, 보험사, 출판사 같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멋스러운 곡선 거리. 역시 사람 눈은 다 비슷한 걸까? 1950년대에 이 거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여럿 제작되면서 상당히 유명해졌다고 한다.
약간 내리막으로 된 길을 따라 얼마간 휴식을 취하듯 내려가니, 분명 처음 온 낯선 곳인데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 시뇨르 비노가 여기도 있네?! 대박!!!” 반가움에 사회가 소리쳤다. “피곤하긴 한데 그래도 들어가 보자.” 중년생이 말했고 두 사람의 신발은 이미 와인 상점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피렌체에서 하나, 바로 어제 로마 카스텔로마노 아울렛에서 하나, 그리고 여기. 생각보다 찾기 쉽지 않은 상점인데도 우연히 자꾸 만나게 되니 와인의 길로 가라는 운명인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몰라도 이탈리아에 있을 때 최대한 즐기자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이미 최대한 즐기고 있지만. 콜록콜록). 결국, 한 병을 골라 들고 계산을 마치고는 호텔로 복귀한 사회와 중년생. 방 안에 짐만 내려놓고선 배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바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멀리 갈 수 있는 체력은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전에 봐뒀던 호텔 근처 적당한 식당으로 직행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진열대에 놓인 샌드위치와 피자가 메인인 자그마한 식당. 하지만 일반 식사 메뉴도 판매하고 있어서 우리는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살폈다. 따사로운 햇살이 기분 좋게 내려앉은 노란색 테이블보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우선 스프리츠 한잔(사회)과 화이트와인 한잔(중년생)을 주문하고 다시 천천히 메뉴판을 읽어 나갔다.
“파스타가 엄청 당기네.” 사회의 말에 “너, 나야?”라며 격하게 동의하는 중년생. 결국, 로마의 파스타 두 가지. 까르보나라와 카치오 에 페페(Cacio e pepe)를 주문했고 얼마 후, 음식이 나왔다. 배고파서였는지 숨은 맛집이었는지 둘 다였는지 기대 이상으로 너무 만족스러운 식사였고, 맛있는 집에 대한 우리의 예우(?)대로 에스프레소까지 주문하여 클리어했다(총 50유로). 가게도 파스타도 예뻐서 기억에 남는 식당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빠르게 호텔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 이제 저녁 산책 전까지 휴식을 취할 차례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꽂은 것처럼 침대에 누워 꼼짝 않고 낮잠을 시작했다. 1시간 경과, 2시간, 3시간... 충전 완료! 일어나 보니 6시가 넘어 있었다. 천천히 남은 잠기운을 날려 보내고, 나갈 준비를 하고는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로 바지를 흔들어대며 여유롭게 밖으로 나왔다. 밝지만 다소 누그러진 햇살이 우리의 산책을 반겨주는 기분이었다. 이제 콜로세움까지는 제법 익숙해서 지도 없이도 발걸음이 거침없었다. 다시 봐도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나의 연예인, 콜로세움의 웅장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우리는 콜로세오 지하철 역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걸었다. 임페리알리 거리는 오른쪽으로 뻗어 있었는데, 해가 질 무렵에 보고 싶어서 먼저 반대편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던 것이다. 콜로세움에서 탁 트인 대전차 경기장 터를 거쳐, 영화 로마의 휴일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진실의 입에 당도했다. 관람시간이 지나 내려진 철문 사이로 실물을 보는데 만족해야 했지만 사실, 사회와 중년생 둘 다 입에 손을 직접 넣고 사진을 찍거나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그것보다 웨딩 케이크(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쪽으로 걷는 길 위로 서 있는 유적들(찾아보지 않아도 유적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포스가 풀풀 풍긴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에 더 바빴다.
7시 40분이 넘어서고 하늘에 희미한 밤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우리 임페리알리 거리는 가봤으니까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에 가보면 어때?” 중년생이 제안을 했다. 이 언덕은 여행 초반, 포로 로마노 투어 중 가이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언덕에서 야경 보시면 정말 좋아요!”라고 한 말에 이끌려 가려고 시도했으나, 엉뚱한 곳에 가는 바람에(그 덕분에 천국의 계단을 알게 되었지만/ 5화_ 로마의 화요일은 휴일 편 참조) 오르지 못했던 곳이었다. 흔쾌히 동의하는 사회와 함께 중년생은 신중하게 지도를 거듭 확인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돌고 돌아 드디어 20여 일만에 제대로 도착한 언덕 정상은 아름다운 구름 아래 한적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한껏 내뿜고 있었다. 정상에서 한 가지 본의 아니게 미안한(?) 일이 있었는데, 목적지에 도착한 기쁨에 손을 잡고 신나게 흔들며 걷는 사회와 중년생의 팔 사이를 비집고 한 아이가 뛰어 지나가다가 벌어진 상황이었다.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너무 빠르게 돌진해 오는 바람에 우리의 팔에 감겨있던 스마트폰에 머리를 부딪혔다. 하지만 태연하게 그냥 지나가며 씩씩하게 웃는 아이. 분명 거의 주먹에 맞은 정도의 충격이 있었을 텐데 전혀 아픈 내색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그냥 그 길로 신나게 뛰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 글을 볼리는 없겠지만, 이 시간을 빌어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는 바이다.(혹은 안 났니? 미처 못 봐서 미안했다ㅠ)
시간은 어느덧 8시. 우리는 언덕 뒤편으로 내려가는 길 쪽으로 이동해서 포로 로마노의 야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역시 경치 명당이어서인지 그쪽에는 사람들이 제법 몰려있었다. 우리도 한 자리 차지하고 유적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점점 지는 노을과 켜지는 불빛.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지는 찬란했던, 그러나 지금은 흔적만 남은 역사의 현장. 비현실적인 낭만의 끝이 우리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강하게 붙잡았다. 얼마나 머물렀을까?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참을 감상하고 내려오니 웨딩 케이크 위로도 멋진 노을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 전체로 확 번지는 밤의 기운. 우리의 팔과 다리에는 어느덧 쌀쌀함이 찾아와 슬그머니 달라붙어 있었다. 파르르 몸이 떨렸다. 이제는 호텔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간단히 저녁장을 보았다. 계산은 카드로 했다. 귀국이 가까워진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현금은 아껴둬야 했으니까.(총 18.56유로) 이제 벌어질 일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의 매일 똑같았다. 돌아와 씻고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선 창문 앞 우리만의 바(bar)에 와인과 사 온 음식을 세팅했다. 이제는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버린 미니 와인잔(피렌체 99 센트샵에서 구입한)도 함께였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시간으로 탈바꿈하면 바로 ‘지금’ 일 거라는 확신이 드는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창문 너머로 로마 오페라 극장의 둥근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 안에서 어떤 오페라가 펼쳐질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오페라에 문외한). 지극히 현실적인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주위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비현실적인 깊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