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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17. 2024

Roma : 아울렛은 처음이라서

4월 27일 (27일차)

‘부온 조르노~’ 중저음의 멋진 목소리를 가진 조식 담당 웨이터 분이 다가와 우아하게 커피 주문을 받았다. 그러고는 더 멋진 미소를 남긴 채, 지금 막 착석한 다른 테이블을 향해 부드럽게 멀어져갔다. 사회와 중년생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음식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테이블로 다가가 아래쪽 선반에 가득 쌓인 하얗고 둥근 접시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접시에 음식을 골라 담아 자리까지 돌아오는데 몇 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오늘 조식에서 사회의 선택은 미니 꼬르네또 2개, 오믈렛 조금, 올리브 몇 알, 햄과 베이컨 약간, 치즈 살짝, 그리고 레드오렌지 주스였다. 중년생의 선택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사회의 선택에서 샐러드가 추가되고 치즈의 종류가 다른 것만 빼면 똑같았다. 거기에 둘 다 따끈한 카푸치노 한 잔씩. 올라올 때만 해도 하품이 나오고 잠도 덜 깬 상태였는데 신선한 바람이 사방으로 통하는 뻥 뚫린 루프탑에서의 식사여서인지 음식을 담아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벌써 정신이 또렷해져 있었다. 식사를 마칠 때쯤이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아까 그 웨이터 분이 다가오더니 혹시 커피 더 필요하냐고 물었다. 아니 이 분?!! 이탈리아인이 관심법을 터득했을 리는 없을 텐데?!! 외모만 멋진 게 아니라 센스까지 만점이었다. 안 그래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더 마실까 말까로 고민하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추가 커피까지 기분 좋게 즐기고 설렁설렁 방으로 다시 내려갔다.


(2023년 4월 27일 목요일)

슬슬 준비하고 나가야 하는데 침대에서 엉덩이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바티칸 박물관을 다녀온 탓에 생각보다 피로가 쌓였는지 온몸 구석구석 안 쓰던 근육들이 아우성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일어날 듯 말 듯 한참 동안 엉덩이를 뭉그적뭉그적 하다 보니 계획했던 시간에서 한참 지나있었다. 본디 오늘의 계획은 카스텔 로마노 아울렛(Castel Romano Designer Outlet) 방문이었고, 테르미니 역 근처에서 11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로 했었다. 하지만 호텔에서 나가기도 전에 이미 10시 50분. 시계를 확인 한 사회가 쿨~하게 말을 던졌다. “좀 더 쉬다가 12시 차 타지 뭐.” 중년생의 지친 몸도 무언의 동의를 했다.

천천히 여유를 부리다가 몸을 일으켜 길을 나선 두 사람. 버스 탑승 위치까지 걸어서 갔는데 중간중간 길가로 관광객들이 줄을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궁금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다름 아닌 시티 투어 버스 줄이었다. 대략의 시스템은 이랬다. 먼저, 호객꾼이 화려한 언변으로 관광객을 모으고 줄을 세운다. 얼마 되지 않아, 천장이 오픈된 2층 투어 버스가 어디선가 나타나 줄 서있는 관광객을 빨아들이듯 태우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러고 나면 다시 호객꾼의 목청이 높아지고 다시 관광객의 줄도 늘어난다. 이 순서가 빠르게, 거의 무한 반복되는 구조였다. 순환되는 속도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꽤 수입이 짭짤할 거라는 생각에 도달했을 즈음이었다.

“뭐 해? 가야지!” 거의 시티 투어 버스 멍을 때리고 있던 중년생은 사회의 재촉하는 말에 정신이 들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스텔 로마노 아울렛 행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때는 오전 11시 45분 정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 몇몇이 이미 정차해 있는 버스 주위로 무질서하게 모여있었다. 잠시 후, 누가 봐도 매표 직원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자 버스 앞 문이 자동문처럼 활짝 열렸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앞에 한 줄로 서기 시작했다. 이 버스가 그 버스 맞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버스 옆면에 큼지막한 글자로 Castel Romano Designer Outlet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원에게 두 사람이라고 하니 왕복 티켓을 두 장 내어줬다. 왕복 티켓은 1인 15유로였다. 버스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 탔을 땐 좌석의 3분의 1 정도도 채 차지 않았는데 불과 10여분 후 정시가 가까워지자 신기하게도 자리가 꽉 찼다. 창밖을 내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채우지 못한 좌석도 없고 탑승하지 못한 사람도 없는 완벽한 만석이었다. 일부러 사람들이 어디 숨어있다가 남은 좌석 수에 맞춰 나오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딱 떨어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쾌감. 내가 운영하는 버스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버스가 미끄러지듯 서서히 출발했다. 앞 유리창 위에 붙은 큼지막한 전자시계를 바라보니 정확히 12시 정각이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본능적인 쾌감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카스텔 로마노 디자이너 아울렛으로 가는 버스(좌)와 우리를 쇼핑의 세계로 인도해 줄 왕복 티켓(우)

아울렛 방문은 처음엔 두 사람의 계획에 없었다. 평소 외국으로 여행을 가도 사회와 중년생 둘 다 명품 쇼핑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랬다면 익히 알려진 베네치아나 피렌체의 유명한 명품 아울렛에 이미 들렀을 텐데, 두 사람은 쇼핑을 위해 왕복 시간도 꽤 걸리는 아울렛 방문에 하루를 투자하고 싶지 않아 하는 타입이었다. 굳이 분류를 해본다면 말이지만.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귀국도 얼마 안 남은 시점에 웬 아울렛이냐? 하면, 그 이유는 대략 3가지였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 사지 못한 가족의 선물 구입을 위해서. 두 번째는 이 아울렛은 명품 중심보다는 일반 의류와 다양한 잡화 중심인 곳이라 볼거리가 풍부할 것 같아서. 마지막 세 번째는 다른 아울렛에 비해 도심과 거리가 가까워서였다. 그리고, 그 세 번째 이유대로 출발한 지 45분 만에 버스는 아울렛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새파란 하늘 아래 지어진 아울렛 단지는 너무 깨끗해서 마치 놀이동산에 지어 놓은 세트장 같았다. 입구 옆으로는 아울렛 전체 지도가 표시된 팻말이 놓여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길을 따라 양 옆으로 뾰족뾰족한 지붕 아래 각기 다른 브랜드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는 구조였다. (뜬금없지만 여기서 잠깐! 읽다 보면 ‘아울렛’이라는 표기가 거슬리는 분이 있을 수 있어 말씀드리고 갑니다. 현재 기준으로 Outlet의 한글 표기는 ‘아웃렛’이 맞으나 우리가 ‘아울렛’이라는 단어에 더 익숙하고, 우리나라 Outlet들 조차도 대부분 정식 한글 명칭을 이렇게 표기하기 때문에 편의상 ‘아울렛’으로 기재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꾸벅.)

마치 놀이동산 세트 마을처럼 깨끗하고 가지런히 정돈된 한적한 아울렛의 전경 (쇼핑 안 하고 쉬기도 좋음)

우선 탐색하듯 가볍게 한 바퀴를 돌았다. 하늘이 워낙 맑아서 산책을 하기에도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정보대로 명품 위주보다는 일반 의류 브랜드와 잡화들이 많은 곳이어서 나름 볼거리가 풍부했다. 중년생이 좋아하는 모카포트를 제조한 이탈리아 브랜드 비알레띠(Bialetti)도 있어서 선물을 다 사고 나면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오늘의 사회와 중년생의 쇼핑 키워드는 ‘현지 브랜드’였다. 요즘 세상에 한국에서도 구하려면 못 구하는 것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이탈리아에 온 김에 우리나라에선 쉽게 볼 수 없는 현지 브랜드를 사고 싶었다. 일단 두 사람이 알고 있는 브랜드는 제외하고, 나머지 중에서 괜찮아 보이는 옷이 걸린 상점으로 무작정 들어섰다. 사회의 아버님 선물로 여름 재킷을 사기 위해서였다. 직원이 우리를 보더니 살짝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영어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짓 발짓을 해가며 정말 최대한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때, 사회와 중년생은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사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영어를 못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해외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는 소리였으니까(만에 하나, 직원이 판매를 위해 못하는 척한 것이었다면 소름이지만). 상점의 직원도 뭔가 새로운 경험이라도 된 것처럼 즐거운 표정이었다. 고심 끝에 우리의 선택은 여름용 아웃도어 하프 재킷. 얇으면서도 내구성도 있어 보이는. 게다가 멋진 스타일까지 갖춘 옷이어서 둘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사이즈 선택이었다. 100 사이즈 입으면 될까? 배가 좀 있으시니 105로 가는 게 나을까?를 두고 의견을 나누며 행거에 걸려 있는 옷의 목 뒷부분 안감에 붙은 사이즈 표를 확인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95, 100, 105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사이즈가 아닌 48, 50, 52... 등의 두 자리 숫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맞다, 여기 유럽이지!” 사실 우리나라에도 요즘엔 유럽 사이즈가 그대로 붙어 있는 옷들이 많아서 애매할 땐 점원에게 물어보곤 했었는데 지금은 아예 말이 안 통하니 은근히 헷갈렸다. 그래서 결국 중년생이 직접 입어보기로 했다. 중년생의 사이즈를 기준으로 아버님의 옷을 선택하면 확실하고도 간단한 일이었다. 최종으로 선택한 옷의 금액을 결제하고 포장하는 동안 아버님이 기쁘게 입으실 상상을 하니 날씨만큼이나 기분도 맑아졌다. 따뜻한 배웅 인사까지 받으며 상점을 나선 두 사람. 잠시 휴식을 하고 나머지 쇼핑을 이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아울렛 내부에 있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이탈리아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스타벅스지만 역시 소비를 위해 조성된 아울렛이라선지 당당히 한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쏟아지는 햇살 덕분에 체력이 빨리 소진된 관계로 카페인 충전이 간절하던 참에 이곳의 존재는 쇼핑가 속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사회는 아이스 오트밀 라테, 중년생은 콜드브루, 그리고 말린 과일과 견과류 한 봉지를 주문했다. 주문할 때, 나중에 음료가 나오면 무슨 이름으로 불러줄지 물어보길래 “Jay”라고 대답했다(이 순간, 우리나라에 스타벅스가 들어온 초기에도 이와 똑같이 불러줄 이름을 묻고는 컵에 적어주던 기억이 떠올라 반가웠다). 이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글 이름을 말하면 발음하기 어려워할 것 같아서 이름 영문 이니셜에 ‘J’가 들어가는 중년생이 그냥 “제이”라고 말했을 뿐. 점원은 질문을 이어갔다. “어디서 왔어?” 중년생이 대답했다. “대한민국. 너 알아?” 점원이 다시 말했다. “당연히 알지! 즐거운 여행 보내!” 관광객에게 하는 매뉴얼 속에 나오는 질문 같았지만 가벼운 친근함에 기분이 좋아졌다.(대화를 읽으면서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급 영어회화 수준이기에 영어로 적을 필요가 전혀 없어서 한글로 표기했다는 점을 고백하는 바이다.) ‘인사치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역시 친절은 반가운 거구나.’ 순간 중년생은 생각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스타벅스, 그리고 잊고 있었던 반가운 '컵에 이름or메시지 적어주기'의 추억

두 사람은 음료를 받아 들고는 야외 테라스 자리에 앉아서 정말 오랜만에(거의 한 달 만에) 아이스커피를 음미했다. 한국에서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주변 사람들이 ‘이탈리아에는 뜨거운 커피밖에 없어서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너무너무 간절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던 것이 떠올라서 주문했지만 사실, 마시면서 드라마틱하게 짜릿하거나 그런 느낌은 없었다. 이탈리아에 온 후로는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아이스커피가 거의 없는 환경의 연속이긴 했으나, 그다지 덥지 않은 날씨여서 목이 심하게 마를 일이 없기도 했고, 이탈리아의 따뜻한 커피가 워낙 맛있어서 아이스커피의 부재를 딱히 불편하다고 느낄 틈이 없기도 했다.

여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아이스커피는 역시 맛있었다. 비어 있는 옆 테이블 위에서는 빵 부스러기를 즐기는 비둘기의 식사가 한창이었다. 한국에서는 비둘기 근처에도 못 가던 사회였지만, 이탈리아 생활 거의 한 달 만에 이제는 바로 옆에서 푸드덕거려도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한국에 돌아와서 1년 여가 흐른 지금은 다시 원상복귀를 했지만:P). 꿀 같은 휴식을 마치고 나머지 쇼핑을 하기 위해 두 사람은 다시 쇼핑 세트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 저 브랜드!” 중년생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왜?” 사회의 질문에 중년생은 뜬금없이 콜로세움 투어를 진행한 가이드 분 이야기를 꺼냈다. “그분이 메고 있던 가방 브랜드야 저거! 맘에 들어서 기억해 뒀는데 여기 있었네!!!” 흥분한 채 상점을 향해 뛰듯이 걸어가는 중년생을 따라 사회도 매장 안까지 휩쓸리듯 들어갔다. 정면 위쪽 선반에 중년생이 눈여겨봤다던 백팩이 놓여 있었다. 가격도 괜찮아서 보자마자 일단 사기로 마음먹고, 매장 전체로 눈길을 돌려 선물용 반팔 티셔츠도 구경했다. 눈여겨보았던 브랜드라 결정이 빨라서 그런지 이것저것 천천히 둘러보고 쇼핑한다고 했는데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매장에서 나와 시계를 확인했다. 5시경에 출발하는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1시간 넘게 여유가 있었다. 선물도 다 샀겠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아까 가보기로 했던 비알레띠 매장으로 향했다. 다양한 모카포트는 물론이고 그라인더와 각종 용품, 심지어 커피 원두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막연히 모카포트 판매 회사로만 알고 있었는데 현지에 와서 보니 커피에 관한 것이 총망라되어 있는 곳이었다. 사회와 중년생은 정말 친절한 점원의 안내에 따라 이것저것 구경을 했고, 최종적으로 두 가지를 구매했다. 하나는 모카포트인데 흔히 볼 수 있는 주전자 모양이 아닌, 윗부분이 분수처럼 갈라져 양 쪽에 놓인 두 개의 에스프레소 잔에 커피가 나누어 추출되는 구조였다. 예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해서 선택했다. 물론, 가격이 착한 것도 한몫을 했다. 나머지 하나는 커피 원두 그라인더였다. 평소 커피를 좋아해 집에서 핸드드립과 모카포트로 즐기는데 그라인더가 없어서 항상 아쉬웠던 두 사람이었다. 물론 원두를 구매할 때 갈아 오면 되지만, 언제나 마음 한편엔 커피를 내리기 직전에 갈아서 가장 신선한 상태로 마시고 싶은 욕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동으로 사지. 귀찮지 않아?” 사회는 수동 그라인더를 집어든 중년생에게 마치 묻듯이 반론을 제기했다. “전혀 귀찮지 않아. 수동이 뭔가 감성 있어.” 확고하게 말하는 중년생. 두 사람의 소소한 의견차는 영원한(?) 커피 갈기 담당으로 중년생이 임명되고 나자 자연스레 해소되었다. “다 샀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사회가 말했다.

아울렛에 도착하고 다시 떠날 때 이용하는 셔틀버스 정류장의 한적한 모습

이제 남은 건 오늘 쇼핑한 품목에 대한 면세(Tax) 서류 절차였다. 아울렛 한쪽에 작은 사무실처럼 마련된 공간으로 가면 창구가 2개 있는데 여기에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가 여권과 함께 구입 영수증을 제시하면 알아서 처리해 주는 형식이었다. 여기서 봉투에 담아주는 서류를 보관했다가 나중에 공항에서 출국 시, 지정된 곳에 제출하면 된다고 했다. 직원들은 친절했고 별다른 문제없이 절차가 끝났지만 줄 서서 기다리는 중에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갑자기 본인이 타야 하는 차 시간이 임박했다고 새치기하고 직원들을 재촉하는 한 관광객의 등장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엄청 친절하던 직원들의 얼굴이 순간 심하게 구겨졌다. 사회와 중년생도 마음이 너무 불편해졌다. 본인이 급할 수는 있지만 그럴 경우 정중히 양해를 구하던가 할 일이지 재촉하고 불평해서 모든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너무도 이기적이고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도 똑같이 느꼈는지 투덜대는 그 사람을 위해 아무도 협조해주지 않았다. 혼자 불평을 쏟아내던 그 관광객은 결국 포기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빌런이 자리를 뜨자마자 거짓말처럼 다시 화기애애해지는 사람들. 역시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기본 매너는 모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세 절차까지 다 마치자 거짓말처럼 버스 출발시각이 정확히 다가와 있었다. 너무 급하지도 너무 남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아울렛에 도착했을 때 내렸던 정류장으로 버스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들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하나 둘 버스에 오르는 관광객들의 양손엔 쇼핑백들이 가득가득 들려있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입가엔 미소가 가득가득 걸려있었다. 서서히 버스가 출발했다. 10분이나 지났을까. 너무 조용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탈 땐 웃고 떠들며 쌩쌩하던 사람들이 거의 전멸해 있었다. 온종일 쇼핑하느라 돌아다녔을 테니 이제 잠으로 충전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사회와 중년생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지금도 돌아오는 버스에 대한 기억은 10분 정도 외에는 전혀 남아 있는 게 없다.

카스텔 로마노 아울렛에서 버스를 탔다(좌), 로마 시내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우)

본능적으로 눈을 떴을 땐 6시쯤이었고 도착해서 버스 문이 열리고 있었다. 누가 깨워줬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이었고, 제대로 충전이 되었는지 몸이 피로 하나 없이 개운한 상태였다. 호텔로 돌아가 쇼핑백들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고개를 돌려 하늘 색깔을 보니 아직 대낮이었다. 벌떡 일어났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 “외식은 귀찮고 와인?”, “콜! 와인에 프로슈토?”, “콜! 프로슈토 받고 올리브랑 토마토!!!” “오케이 컴온 가즈아!!!” 준비된 대사를 주고받는 연기자처럼 두 사람의 티키타카는 환상적이었다. 와인은 아까 아울렛에서 구매한 것을 오픈하기로 했으니, 근처 마트에 가서 곁들일 것만 사 오면 그만이었다. 패션 아울렛에서 무슨 와인인가 싶겠지만  거기서 구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렛 한 구석에 피렌체에서 우리가 애정했던 와인 구입처인 ‘시뇨르 비노’가 떡하니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바롤로(Barolo) 한 병을 홀린 듯 집어 들었던 두 사람이었다. 신들린 계산대 직원(26화 바티칸도 다시 한번 편 참조)이 있는 근처 마트에서 프로슈토와 모르타델라, 방울토마토, 올리브, 고르곤졸라 치즈, 삶은 야채(그린빈, 감자, 미니당근으로 구성된)를 사서 방으로 돌아왔다(총 20.56유로).

호텔 방바닥에 앉아야 나오는 뷰지만 마지막 5일을 함께 했던 우리 방의 명당

이제 다음 순서는 말하지 않아도 정해져 있었다. 먼저 씻고, 로마 오페라 극장이 보이는 창문 앞에 사 온 음식과 와인을 세팅하고, 잔에 와인을 따르고, 인증 사진(하지만 아무에게도 인증하지 않고 개인 소장을 위한)을 찍고, 흡입과 수다, 그리고 다시 흡입, 연이어 수다, 수다 또 수다의 끝없는 돌림노래가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창 밖으로 점차 붉어지는 노을과 유난히 밝은 바롤로 특유의 붉은빛과 호텔 커튼의 붉은색이 만나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얼큰해진 사회와 중년생의 네 볼도 따라 붉어졌다. 이젠 얼마 남지 않은 하루하루가 가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눈시울도 살짝 붉어졌다. 어느덧 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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