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9일 (29일차)
빵 두 개, 스크램블 에그 약간, 베이컨 하나, 치즈 두 알, 햄 두장, 그린 올리브 5알, 루꼴라 약간이 담긴 하얀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의자에 앉아 청명한 하늘이 뒤덮고 있는 로마 시내 전경을 감상하는 중년생. 잠시 후, 거의 비슷한 메뉴를 담아 테이블로 돌아온 사회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2023년 4월 29일 토요일)
“내일은 아마 조식 안 먹겠지?” 사회의 말에 중년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잠깐 생각을 해보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짐 싸느라 정신없을 테니 내일은 먹지 말자.” 순간, 사실상 이곳에 올라오는 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루프탑과 로마 시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 테이블 위치가 가장 안쪽이라서 한창 식사 중인 다른 투숙객 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대안. 테이블 안쪽의 유리벽면에 반사된 루프탑의 모습을 찍어두기로 했다. 풍경은 생생하게 담기지 않겠지만, 사진을 볼 때마다 이 당시의 상황만큼은 아주 생생하게 떠오를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사실 셔터소리는 안 났지만) 찰칵-
방으로 돌아와 간단한 차림으로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나선 사회와 중년생. 목적지는 판테온이었다. 처음 봤을 때,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던 걸작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보고 싶기도 했고, 간 김에 바로 옆에 위치한 카페 타짜도로에 들러 원두를 살 계획이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과는 달리 첫걸음부터 몸이 무거웠다. 지난밤 충분히 잤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가는 동안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당연히 지난 한 달 동안 계속된 낯선 외국 여행으로 인해 쌓인 피로가 주된 원인이겠지만, 그 잠재된 ‘피로’를 아침부터 끄집어낸 주인공은 ‘내일이 여행의 끝이라는 생각’이었다. 비유가 좀 그렇긴 하지만, 용변(=여행의 피로) 참기를 예로 들어보자. 화장실(=여행의 종착점)이 아직 멀 때는 용변은 잔잔한 호수 같아서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하지만 잘 참다가도 이제 화장실에 다 와간다고 생각하는 순간 ‘긴장’이 붙잡고 있던 든든한 문의 빗장은 풀리고, 잠잠했던 호수는 걷잡을 수 없는 거친 바다의 파도로 돌변하여 우리를 덮치는 것이다. 흠흠.
그렇게 천천히 도착한 11시 30분경의 판테온은 여전히 경이로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만, 주말인 토요일이었고 시간도 시간인지라 그 앞 광장은 관광객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광장 바닥보다 사람들의 신발이 더 많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얼마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판테온이 공연장 위의 ‘가수’고 관광객들은 그 가수를 보러 온 ‘관람객’처럼 느껴져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열광하는 대상이 다를 뿐, 어찌 보면 ‘여행자’도 하나의 ‘관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관광객들 사이에 스며들어 팬심으로 판테온을 얼마간 감상한 후, 아쉬운 발길을 돌려 도착한 근처 카페 타짜도로. 이곳에서 우리는 커피 원두 4 봉지(총 26유로)를 샀다. 아울렛에서 커피 그라인더도 구매한 김에 한국에 돌아가서도 얼마간 비슷한 맛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에게 한 두 봉지 정도는 선물로 줄 생각이기도 했다.
계산을 마치고는 미련 없이 방향을 틀어 걸었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유적지가 즐비한 로마 한복판에서 어이없을 수도 있지만, 목적지는 작은 마트였다. 오가다 몇 번 들렀었는데 사회가 좋아하는 골리아 캔디를 가장 저렴하게 판매하는 곳이었다. 평소, 뭘 많이 사가는 여행스타일이 아닌 두 사람이었지만 이번 여행은 예외였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르는 먼 나라’라는 사실이 큰 핑곗거리로 작용한 데다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캔디’쯤은 왕창 사가고 싶어진 것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담다 보니 무려 24통을 담는 기염을 토했다. 싹쓸이 어글리 관광객이라고 욕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먹고 싶어서 그랬어요. 흑흑.
정신을 차려보니 체력은 벌써 방전에 가까운 상태였다. 여행 초기에는 100%였던 배터리의 성능이 귀국할 때가 다가오자 많이 떨어져서 완충을 해도 금세 방전이 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일단 호텔로 돌아가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충전을 해야 했다. 이윽고 방안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2시 30분. 우리는 축 쳐진 몸뚱이를 충전기 위로 던지듯 눕혔다. 그리고 그 충전기의 이름은 다름 아닌 ‘침대’였다.
눈을 떠 보니 3시. 한국에선 그렇게 청해도 오지 않던 ‘낮잠’이 여행지에 와서부턴 청하기도 전에 달려드는 경험이 오늘도 반복되었다. 완충된, 그러나 몇 시간이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는 몸을 이끌고 다시 로마 시내로 나선 두 사람. 이번 목적지는 스페인 계단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시뇨르 비노에 들러 귀국길에 함께 할 와인 몇 병도 사 오기로 했다. 굳이 오늘 하루의 테마에 이름을 붙여보자면 이른바 ‘관광 겸사겸사 쇼핑’이었다. 오전의 판테온 & 타짜도로부터 오후의 스페인 계단 & 시뇨르 비노까지.
우리는 호텔에서 내리막길 방향으로 가다가 신호등을 하나 건너, 평소 다니지 않던 터널길로 들어섰다. 밤이었다면 후미져서 선택하지 않았겠지만 낮이기도 했고, 근처를 오가며 궁금했던 길이기도 해서였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크기도 스타일도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터널 안을 걸으면서 중년생은 새삼 ‘국가’라는 단위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국가가 바뀌면 언어는 물론이고 음식, 건축양식, 심지어 신호등 속 사람 모양까지 달라진다. 아무래도 지리상으로 가까운 국가끼리는 비슷한 점이 많을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국경을 넘으면 분명,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직접 넘어보지 않고서는 미묘한 ‘문화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한국도 제대로 가보지 않으면서 해외여행하는 사람들은 허영이고 사치가 아닐까?’하는 막연하면서도 편협한 사고를 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하는 추측이 섞인 비판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하기에 보다 신중해야 한다.
모처럼 심각한(?) 주제로 머리를 혹사하며 당도한 스페인 계단은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꽃이 가득한, 탁 트인 광장의 모습(비록 이곳도 관광객들로 가득하긴 했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을 보자마자 무거워졌던 머리가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호기심에 계단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서니 카페 그레코(Antico Caffe Greco)가 나타났다. 평소 커피를 좋아하는 두 사람인지라 당연히 1760년부터 시작된 역사를 경험해보고 싶었으나, 역시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기로 했다. 가뜩이나 사람 많은 관광지인데 토요일까지 겹치니 현재의 체력으로는 기다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 피렌체의 카페 질리와 같은 오랜 역사의 카페를 경험해 본 터라 이제는 그쪽으로는 크게 궁금하지 않기도 했다.
인파 속에서 여기저기 휩쓸리다 보니 몸의 배터리가 빠르게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겸사겸사 데이의 목적 달성을 위해 시뇨르 비노 와인 상점으로 갈 시간이었다. (아마도) 최단 코스로 빠르게 도착한 두 사람. 이제 이 정도 길은 익숙해서 스마트폰 맵을 볼 필요도 없었다. 막 매장 문턱을 넘어설 때만 해도 한병 살까, 두병 살까로 망설이더니 탐나는 와인 진열대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자 귀국할 때 1인당 몇 병까지 가능한지를 검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허용 수량인 각 2병씩을 다 채우자는데 합의했다. 그래서 고른 5병의 와인들. 왜, 4병이 아니라 5병이냐고? 1병은 오늘 로마, 아니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에 마실 병이었다. 귀국 때 가져갈 4병의 구성은 아마로네, 바롤로,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삼총사 외에 남부 시칠리아 지방의 와인을 골랐고, 오늘 마실 1병은 이탈리아 중부 지방에서 생산된, 이름에도 로마(ROMA)가 들어간 것으로 선택했다. 의미도 의미였고, 맛도 궁금해서였다.
그다음 순서는 말할 것도 없이 호텔 복귀였다. 이제는 여행 막바지의 피로 때문에 딱히 더 보고 싶은 곳도 없었지만, 와인 덕분에 두 팔이 축 쳐질 정도로 무거운 짐이 생긴 탓에 어디를 더 다닐 수도 없었다. 호텔 방에 들어와서는 무거운 와인을 내려놓고, 바로 간단한 회의에 돌입했다. 안건은 마트에 가서 저녁장을 보고 와서 쉴 것인가, 좀 쉬다가 마트를 갈 것인가였다. 그러다 사회가 갑자기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 때려죽여도 지금은 못 나가겠다. 있다가~ 있다가!” 중년생이 따라 침대에 머리를 댔다. “그래 30분만 쉬자!”
눈을 떠보니 시간이 또 훌쩍 지나있었다. 30분이 2시간이 되는 마법. 피로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능력을 가진 게 분명하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내려가 호텔 바로 앞 대로의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파랗게 바뀌길 기다렸다. “뭐 먹고 싶어?” 중년생이 말했다. “마지막이니까 뭐든 다!” 중년생의 얼굴을 보며 사회가 신이 난 듯 말했다. 그 순간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다 사라는 신호네~ 히히!” 웃으며 건너편 마트로 겅중겅중 뛰어가는 사회를 따라가는 중년생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씻고 마지막 저녁 세팅을 했다. 다 사겠노라며 뛰어갔지만, 막상 두 사람이 사온건 평소와 다름없었다. 방울토마토, 올리브, 고르곤졸라 치즈, 감자와 야채 삶은 것, 약간의 살루미까지. 로마 와인과 곁들일 저녁 메뉴가 차례로 우리가 만든 방안 바(bar)에 차려졌다. 중년생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솜씨로 와인 코르크를 오픈했다. (처음엔 서툴러서 코르크를 반토막 냈었는데 한 달 새 일취월장했다. 뿌듯-) “코르크 잠깐 줘봐!” 사회의 말에 중년생이 코르크를 건넸고, 사회는 볼펜으로 그 위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 ‘2023. 4. 29. 로마 마지막 밤 로마 와인과 함께’
아쉬움에 더 빨리 가는 밤 시간이었다. 중년생이 갑자기 구글 맵을 켜고 화면 캡처를 했다. “뭐 해?” 사회의 질문에 “기념하려고.”라고 대답하며 캡처한 화면을 보여주는 중년생. 다름 아닌 로마 한복판에 찍힌 우리의 위치였다. 틀어진 TV의 바티칸 채널에선 CCTV에 찍힌 현 시각의 바티칸의 전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지. 12시가 넘었으니까. 시간을 보니 오전 12시 34분이었다. 4월의 마지막 날이자 이탈리아에서 우리의 마지막 날이 그렇게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