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5/1 (30일차, 다시 한국 1일차)
늦잠은 자지 않았지만 예정대로 조식을 건너뛰었다. 사실 짐을 싸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닌데 평소보다 무언가 분주한 아침이었다. 몸의 시간은 충분해도 마음의 시간에 여유가 없다, 항상. 어딘가를 완전히 떠나는 날은 꼭 그렇다.
(2023년 4월 30일 일요일)
지금 막 ‘Room 819 out’이라고 쓰인 종이를 호텔 직원이 사회의 캐리어 손잡이에 둥글게 말아 걸고 있었다. 체크아웃을 하면서 시티택스까지 지불을 마쳤지만, 귀국 비행기 시간이 밤인지라 그전까지 우리의 짐을 맡겼기 때문에 그렇게 표시한 것 같았다. ‘체크아웃을 마친 819호가 맡긴 짐’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종이. 말 그대로 ‘아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매일 저녁 오붓한 만찬을 즐겼던 이 호텔 819호에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너무나 아쉬웠다. 서운한 감정이 들 정도로.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로마시 중심의 남서쪽에 위치한 트라스테베레(Trastevere) 지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테베레 강 건너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듣자마자 우리나라의 강남, 강북이 떠올랐다. 인류의 문명이 탄생한 지역들만 살펴봐도 모두 강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작명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 9시 넘어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까지는 상당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지난 한 달 동안 가보지 않았던 곳을 마지막 목적지로 선택한 것이었다. 여행 온 뒤로 늘 그랬듯, 오늘도 도보로 이동했다. 비가 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구름 가득한 하늘이 우리를 계속 따라왔다. 아직 내리지 않았을 뿐, 오늘 언젠가 반드시 한 번쯤은 쏟아질 거라는 확신 섞인 경고를 전해주려는 듯이.
사회와 중년생은 천천히 테베레 강까지 걸어가서 가리발리 다리(Ponte Garibaldi)를 건너 트라스테베레 지구로 진입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고 젊은이들이 많은 제법 힙(?)한 동네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구석구석 뒤져보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귀국하는 날인 데다가 한 달간의 여행으로 피로가 쌓인 상태였으므로 무리하지 않고 가볍게 돌아보기로 했다. 먼저, 두 사람 모두 그리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여서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남쪽 구역까지 걸어가 보고 그 이후에 근처 카페에서 여유롭게 쉬자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유는커녕 시장을 가까스로 둘러보고 식당으로 직행하기 바빴다. 시장은 예상했던 것보다 거리가 멀었고, 찾기도 쉽지 않았으며, 비포장 도로를 한참 지나가야 해서 체력소모가 컸던 것이었다. 약간의 부슬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우리는 적당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 테라스 석에 앉았다. 앉고 보니 완자를 메인으로 하는 곳이었다. “이런 곳은 처음인데 잘됐다!” 중년생이 메뉴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파스타든 수프든 거의 대부분의 메뉴에 미트볼이나 피쉬볼 같은 것이 함께 들어가는 구성이었다. 우리는 스프리츠와 화이트 와인으로 지친 숨을 돌리고는, 메뉴판 및 주변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메뉴를 번갈아 참고하며 주문을 마쳤다. 날은 흐렸지만 이미 4월 말인 데다가 부슬비로 인한 습기가 더해져 제법 덥게 느껴졌다.
“아까, 그 사람 정말 재밌지 않아?” 스프리츠를 한 모금 마시고 여유를 찾은 사회가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좀 전의 골목에서 지나쳤던 한 가게의 점원이었다. 관광객들을 향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는데 동양인인 우리를 보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고 있던 멘트가 바뀌었다. “안녕하세요?” 분명한 한국말이었다. 동양인 중에서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반가워서 대답하려고 하는데 그 순간! 점원은 부드러운 랩처럼 다음 말을 이어갔다. “니 하오~ 곤니치와~ 사와디캅~ 하지메 마시데~ 예쁘(뻐)요~ 니 츠 판러마...” 순간, 사회와 중년생은 그야말로 웃음이 빵-하고 터져버렸다. 우리와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리드미컬하게 본인이 아는 아시아 말을 총 동원해서 내뱉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이 흥겨워 보였다. 그리고 그 노래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는데 치명적인 중독성이 있었다. “나도 아직까지 머리에 맴돌아. 정말 웃겨!” 중년생이 맴도는 가사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대답했다.
맛있는 완자들을 흡입한 우리는 에스프레소까지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를 채우고 체력도 보충했으니 다시 새로운 목적지가 생긴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자니콜로 언덕(Colle del Gianicolo)에 올라 로마 시내 전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트레비 분수의 건축에 영감을 주었다는 델라쿠아 파올라 분수(Fontana dell'Acqua Paola) 옆에서부터 언덕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서 내려오도록 나 있는 자니콜로 산책로(Passeggiata del Ggianicolo)를 따라 걷다 보니 금방 언덕 정상이었다.
한적하고 탁 트인 광장의 복판에는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동상이 서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탈리아의 통일부터 왕국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Giuseppe Maria Garibaldi)의 동상이었다. 로마 7대 언덕에는 속하지 않지만 상당히 유명한 언덕인 자니콜로. 맑은 날은 아니었지만 나무들 너머로 시내의 전경이 안정감 있게 시야에 들어왔다. 난간에도 앉기 편하게 되어있어 연인들이 많이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은 이따금씩 부슬비를 뿌리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순간, 화초를 살피면서 분무기의 손잡이를 쥐었다 폈다 하는 동네 꽃집 사장님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슬슬 호텔로 짐을 찾으러 돌아갈 시간이었다.
캐리어를 찾아 테르미니 역에 도착했을 때는 4시 20분경이었다. 출발 시각이 밤 9시 25분이고, 탑승 시간도 8시 45분인 비행기라서 시간은 지나치게 충분했지만, 만약의 사태를 항상 염려하는 쫄보인 중년생이기에 일찍 가는 것이 마음 편해서였다. 도착한 플랫폼의 건너편에는 이런 중년생과는 완전 반대 성격(?)으로 추측할 수 있는 여행자 한 명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을 베개 삼아, 본인 집 안방마냥 다리를 꼰 채 정말 편한 자세로 누워있는 모습만 봐도 예상이 되는 느긋한 성격의 여행자였다.
잠시 후, 한 달 전 공항에서 로마까지 우리가 타고 왔던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열차가 소리를 내며 플랫폼으로 들어왔고 멈춰 섰다. 곧 문이 열렸다. “캐리어 조심해.” 사회와 중년생은 그렇게 이번 여행에서 4번째 들른 로마 테르미니 역의 플랫폼에서 진짜 마지막 발을 뗐다.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열차는 공항을 오가는 쾌속 열차이기 때문에 짐을 실을 공간이 넉넉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편했다. 캐리어 두 대를 나란히 세워 놓고 바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자 서서히 열차가 출발했다. 창 밖을 내다보니 뒤편으로 점점 테르미니 역이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정말 떠나는구나.’ 중년생이 생각했다. 아마 사회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지잉- 비행기의 탑승구가 E23번으로 변경되었다는 스마트폰의 알림이 울렸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탈리아 피우미치노 공항의 E23번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바뀌기 전의 탑승구는 어디였는지 우리가 전혀 알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뀌게 된 연유도 궁금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알림은 두 사람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그 알림이 ‘진짜 이탈리아를 떠나는 신호’로 다가왔으니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 화물 수속을 했다. 시간은 넉넉할지라도 해야 할 절차를 미리 마치고 면세 구역으로 들어가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캐리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했다. ‘너도 우리만큼 한 달 동안 고생했다.’ 평소 같으면 오글거려서 상상조차 안 했을 대사를 마음속으로 내뱉는 중년생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상황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
검색대까지 통과해서 면세 구역으로 입성한 사회와 중년생. 탑승 시간까지는 2시간 넘게 여유가 있었다. “이제, 타기만 하면 되네.” 중년생을 바라보며 시원 섭섭한 듯 사회가 말했다. 그때, 눈앞으로 젤라또 가게가 들어왔다. “기분이 다운될 땐 젤라또지!” 사회의 손을 잡고 가게로 직진하는 중년생. 두 사람은 젤라또를 하나씩 주문했다.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있는 유명한 체인 젤라또 집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엄청 친절한 점원(돌이켜보면 이탈리아 최강의 친절함이었다/정확히는 볼로냐의 마르코와 함께 친절 2대 천왕)이 건네주는, 꼭대기에 쿠키까지 박힌 젤라또를 받아 들고 한 입씩 베어 물고 나니 다소 침체되었던 기분이 말랑말랑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뭘 할까?’ 상의 끝에 주머니를 뒤져서 남아 있던 유로화를 소진하기로 한 사회와 중년생. 금액에 맞춰 유명하다는 소금과 커피원두까지 사고 나니 마지막으로 손 위에는 6유로뿐이었다. “커피 마시면 딱 떨어지겠다.” 사회의 제안대로 우리의 마지막 소비는 커피였다. 마지막 모금이 목구멍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그 많던 시간도 어느덧 다 소비되고 없었다.
E23번 탑승구 앞은 한국사람들로 가득했다. 대한민국 국적기의 탑승구 앞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신기하고 반가웠다. 자유 여행이어서 그런진 몰라도 가이드 투어 때를 제외하면, 지난 한 달 동안 여행지에서 한국분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까만 해도 떠난다는 사실이 서운했는데, 이탈리아와는 ‘작별’이지만 한국과는 다시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설레기 시작했다. 작별이 있으면 반드시 만남이 있다는 흔해 빠진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어딘가를, 누군가를 떠날 때나 만날 때나 똑같이 “안녕!”이라는 단어를 건네지 않는가? 어쩌면, 작별과 만남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언제나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인사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 안녕! 대한민국 안녕!
정확히 밤 8시 45분이 되자 탑승구가 열리고 사람들이 비행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좌석에 앉아 바라본 비행기 창문에는 밤의 빗방울이 맺혀있었다. 한 달 전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땅 위를 바퀴로 움직이던 비행기는 이륙 출발선에 다다르자 잠시 정차했다가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다가 몸이 뒤로 급격하게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늘이었다. 허공에 발길질을 하듯 어디 하나 디딜 곳 없었던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떠나왔던 이탈리아에서의 한 달. 그 시간을 뒤로하고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빠르게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날개를 흔들림 없이 펼치고 있었다.
그다음은 기내식 섭취와 꿀잠의 반복이었다. 자고 먹고 또, 자고… 마지막 식사가 나왔을 때, 무심코 비행기 모드로 전환된 스마트폰의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6시 31분이었다. 4월의 마지막 밤에 비행기에 올랐으니 분명 오늘은 5월의 첫날, 월요일 아침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아니면, 비행의 피로 때문인지 스르륵- 어느샌가 다시 졸음이 찾아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중년생의 눈꺼풀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2023년 5월 1일 월요일)
“잠시 후 인천 공항에...” 기내 도착 방송에 중년생의 눈이 떠졌다. 기내식을 먹고 잠깐 쉰다는 것이 거의 3시간 가까이나 잠든 모양이었다. 스마트폰 시계는 오전 10시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시 후 굉음과 함께 착륙하는 우리의 비행기. 바퀴가 지면에 닿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쥐어졌던 주먹이 긴장과 함께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 드디어 한국이었다.
띵- 안전벨트 지시등이 꺼지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오랜 시간 답답한 자세로 앉아있던 승객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모두들 재빠르게 머리 위 짐을 꺼내고는 해방을 기다리며 출입구 쪽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무서운 기세로 들썩이는 인파에 떠밀리듯 내린 비행기. 사회와 중년생은 손으로 들고 내린 배낭의 끈 사이로 팔을 집어넣으면서 동시에 하품과 기지개를 켰다. 이어서 스마트폰의 비행기 모드부터 해제하는 두 사람. 방금 전까지 오전 10시였는데, 갑자기 오후 5시로 변하는 마법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순간 늘어났었던 7시간을 한 달 만에 고스란히 반납한 것이었다. 내 수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중에 떼 가는 세금처럼.
띠리릭-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다. 받았다가 반납한 7시간과는 반대로, 이탈리아로 떠날 때 두고 갔던 일상의 걱정거리는 예상대로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고. 스. 란. 히.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고스란히’라는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모습이 미묘하지만 분명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걱정거리’의 절대적인 총량은 여행 전후가 똑같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느끼는 상대적인 크기는 보잘것없을 만큼 작아져 있었다.
순간, ‘단절’에 감사했다. 13일차(무조건 먹고 볼로냐) 편에도 썼듯이, 평소 단절이라는 것이 매정하고 부정적인 단어라고 생각했었는데, 때에 따라서는 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 상냥한 단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으니까.
‘걱정거리’와 얼마간의 완벽한 분리 시간을 거치고 나니 한 발짝 정도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느낌이었다. 바로 밑에선 올려다봐도 꼭대기가 가늠조차 되지 않던 높은 건물이 멀리서 보면 전체가 쉽게 파악이 되는 것과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실체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걱정거리는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해결이 예약된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회와 중년생은 현관문에 서서 서로를 마주 봤다. 말은 오고 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그 순간 분명히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이제, 바퀴를 접은 비행기처럼 허공에 떠있는 기분이 들더라도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목적지를 모를 뿐, 그건 좀 더 멀리 가기 위해 꼭 필요한 ‘여정’ 일 테니까. 우리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묵묵히 그 시간을 버티면 된다.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책을 읽고 창밖을 내다보며 흘러가는 구름을 즐기면 되는 것처럼. 견디다 보면 다시 발은 땅에 닿고, 콜로세움도 판테온도 스테이크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원하던 곳이 아니라면 다시 비행기에 오르면 된다. 걱정 말고 다시 날아오르면 된다. 우리는 그 누구도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려보기도 전에 인생에 함부로 쫄지 말자.
사회와 중년생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섰다. 그리고 한 달 묵은 공기를 버리기 위해 집 안의 모든 창문을 열었다. 순간. 새로운 공기가 집 안에 가득 채워졌다. 참 시원하고 예감 좋은 공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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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더하기)
처음 ‘중년생’인 필자가 이 여정을 함께 떠났던 ‘사회’에게 오래오래 두고 추억할 수 있도록 기록해 두자는 취지로 쓰기 시작했던 소소한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바이다. “시간을 내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돌이켜보면 불안함을 안고 떠난 길의 끝에 감사함만 남은 여행이었다. 그리고 ‘일상을 여행처럼’이라는 말의 의미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여행이기도 했다. 일상도 여행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반복되는 하루하루라 할지라도 조금은 더 즐겁고 색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탈출구 삼아 도망치듯 떠났던, 하지만 다녀와 보니 탈출구는 정작 내 안에 있었던, 2023년 4월 한 달간 이어진 30편의 기록. 기행문도 소설도 일기도 아닌 이 글을,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평범하지만 행복해지고 싶은 모든 사회중년생들에게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