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다녀와서의 첫 목표는 여자 친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대학교 친구들도 별로 없었고, 일찍 군대에 입대 한 만큼 아는 얼굴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머물다간 분명 로맨틱한 캠퍼스 생활은 다시는 안 올 것을 알기에 맹목적으로 여자 친구가 생기길 바랐다.
하지만 복학생이라는 인식이 붙어 있는 시점에서 후배들은 뭔가 차별점을 두는 것 같았고, 괜히 스스로 겉돌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하는 법은 없다고, 나는 나와 비슷하게 겉도는 느낌이 나는 여후배에게 다가갔다.
"나는 당연히 후배일 줄 알았는데..."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꼬시려고 해 본 여자는 나와 같은 동기였다. 기억에도 없는. 그녀가 왜 아직 2학년인지는 그땐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유난히 절약에 신경을 썼다.
데이트를 하고 싶어도 그녀의 아르바이트 때문에 무산이 되는 경우도 많았고, 장학금을 받으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행동에 따라갔고 그녀의 그런 점이 싫거나 하진 않았다. 좋은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녀와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았기에 여러 가지 제안을 해 보기도 했다.
"제주도 가 본 적 있어?"
"아니?"
"이번에 방학하면 안 갈래?"
"제주도는 여름에 성수기라서 엄청 비싸다던데."
"그만큼 가볼만해서 그런 거 아닌가 싶은데."
"제주도면 당일치기로 다녀와도 되고 학기 중이나 겨울에 다녀와도 좋을 것 같은데. 한적할 것 같고."
그렇게 그녀는 늘 내가 내놓는 의견에 마냥 좋다고 하는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게 싫증이 났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께서 치료비가 계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 또한 이해하는 수 밖엔 없었다. 그게 조금 서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선 가족도 소중했기에 나만 욕심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졸업하면 뭐 할 거야? 결정했어?"
3학년 2학기가 되었을 때, 그녀가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입학할 때부터 공무원 준비하려고 했어. 고등학생 시절 때부터 아빠랑 그런 쪽으로 의논했었거든."
"공무원이라.9급?"
"응. 너도 그러려고 행정학과로 온 거 아니야?"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대학은 가고 싶어서."
나는 사실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진짜일지도 모르겠지만, 행정학과로 입학하고 이어지는 진로들은 대부분 공무원 계열들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줄도 모르는 계열인데, 여러모로 돈이 필요한 그녀가 대학교를 그만두지 않는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나도 공무원 준비할래."
"뜬금없이?"
"뜬금없다기 보단, 학교 아니면 같이 있을 시간도 적을 것 같으니까. 같이 공부하면 더 힘이 될 것 같고. 뭔가 목표가 생기는 느낌도 들고. 그렇지 않아?"
"글쎄."
"뭐야. 아냐?"
"아니. 좋지. 나야 좋지."
그래도 그녀가 나의 여자 친구라고 그녀의 집안 사정까지 걱정이 이어지곤 했다. 그녀와 연애기간이 길어지면서 서로 부모님에게 인사까지 했다. 양측의 분위기는 다른 편이었다. 우리 쪽 부모님은 그저 아들이 여자 친구 사귀는 것뿐이라는 듯, 공부에 큰 영향 없이 잘 지내라는 그 정도뿐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의 어머니는.
"이거 단순히 헛개차가 아니라 헛개나무를 우려낸 거야. 간에 엄청 좋아. 피로 해소에도 좋고."라고 말씀하기며 한 박스의 건강식품을 챙겨 주시기도 하며, 용돈까지 쥐어주시곤 했다.
그런 부분에서 묘한 온도차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이것저것 해주시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뭔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기대감을 받는 게 부담감보다는 기쁘다는 것을 느꼈다.
그 시점에서부터 이미 공무원이 되고, 정말 착실하게 직장도 잘 다니게 되면, 어른들에게 인정받는 어른이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그런 기분. 그건 사회적으로 경쟁력 그 자체이기도 했다.
"천만이다 천만. 영화 관람객 수가 천만이 넘었는데 우리만 안 봤어."
나는 그날 그렇게 그녀와 데이트로 이어나가고 싶었다. 꼭 그 영화를 봐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영화를 보자고 하면 인터넷 결제로 같이 보자고 할 것이며, 커피 마시러 카페 가자고 하면 인스턴트커피를 탈 게 뻔했다.
"어차피 히어로 물 영화라는 게 악당을 이기고 끝 아냐? 근데 봐야 해? 한 달 후에 시험인데." 역시 그녀는 그렇게 나왔고, 나는
"내용 궁금하단 말이야~"라고 하며 달라붙어 보기도 했다.
"자, 잠깐만."
"보.고.싶.다.고~"
"알았어 그렇게 문대지 마. 그리고 내가 은근슬쩍 여기 만지려고 하지 말라고 했지?"
"뭐? 어디?"
그렇게 끝으로 나는 좀 더 그녀를 안고 싶었던 손을 떼어냈다.
그렇게 2년 하고도 반. 우리의 연애가 5년이 넘어가고 있던 시기.
결국엔 결과를 얻어냈다.
"미안. 나도 합격했어야 했는데."
그녀만, 말이다.
안타깝게 서울직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던 그녀는 바로 지방직에 합격선을 넘겼고, 올해의 마지막 시험이었던 만큼, 나는 또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다. 그건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적어도 올해 안에 한 번 더 시험이 있었다면 벼랑 끝이 아니라 이미 벼랑에서 떨어지고 있는 도중이라도 어떻게 살아남아 보려고 발버둥을 쳤겠지만, 시간이 긴 만큼 더 좌절감이 몰려왔다.
"괜찮아. 이젠 내가 도와줄게.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더 괴로웠다.
그녀가 먼저 합격해서 배 아픈 게 아니었다. 여러 가지로 불안함이 더 컸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가 먼저 사회에 나가는 만큼 내가 빨리 합격하지 않는 이상 서로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는 만큼 변화가 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왔어~ 아직 밥 안 먹었지? 같이 먹자."
이제는 그렇게 그녀가 나를 위해서 도시락을 싸오기도 했고, 퇴근을 하면 바로 나에게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무원 업무는 어때? 할만해?" 내가 물었다.
"응? 할만하지. 조금 야근이 불특정 하게 있는 게 좀 그렇긴 한데. 괜찮아."
"그래."
그렇게 그녀는 자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직장 사람들은 어때? 사람들 많아?"
"많지는 않지. 근데 뭐랄까. 오랫동안 근무를 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조금 텃세가 있는 느낌이 좀 있지."
"그런 건 회사나 사무소나 다를 게 없나 보네."
퇴근 후에는 제일 먼저 먹을 것을 가져와서 나를 찾아주는 그녀는, 분명 고마워야 할 사람이긴 한데 어째 시간이 갈수록 미안함이 커지고 그만큼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순수하게 웃어본 적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죄를 하나씩 쌓는 것 같았고, 어떨 때에는 퇴근 후엔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점점 그녀를 닮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위험신호이기도 했다.
그녀와 내가 편의점을 가게 된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어째 점점 지쳐가는 모습이었고, 나를 위해서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원래부터 절약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그녀와 만난 시간이 있던 만큼과 나의 처지가 그랬던 만큼 나는 100원 200원을 아끼기 위해서도 몇 분 이상을 가격을 비교하곤 했다.
편의점에서 그렇게 생필품을 사고 있던 우리는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그녀가 먼저 나가고 나는 나대로 가격을 비교하면서 이것저것 살피고 있었다.
사실 총합 1000원도 안 되는 절약을 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을 보면 비참하기도 한데, 내 실사정이 1000원도 아까운 마당에 어쩔 수도 없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행동은 그녀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 것도 그 편의점 안이었다.
나는 아직도 물품을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20분이 지나도록 계산하고 있지 않는 나를 보면서 그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을 보냈다.
그건 극단적으로는 나를 경멸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낯설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해명을 하든 하지 않든 우리 사이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 이후로는 어떤 감정으로 내 안이 채워지고 있었는지 그 어떤 걸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감정이었다. 허무하다면 허무하고, 압박감이라고 하면 압박감이고, 괴로움이면 괴로움이고 그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다 내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무원 시험을 계속 준비한다고 이미 30대에 접어들기도 했다. 다른 길로 가기에도 어려운 처지이며 모아둔 돈도 없고, 어떻게 해서든 이 길을 쭉 파서 합격을 해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1년이 더 지났음에도 변화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젠 무슨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유림이. 한 번 보자고 말해 줄래?"
그렇게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왜?"
"왜긴 오랜만에 얼굴 보려고 그런 거지. 혹시 헤어진 거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건 아니지만, 어째 단순히 얼굴만 보고 싶어서 그런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좀 봤으면 해. 네 아빠도 같이."
"그러지 마. 부담돼."
"부담은 무슨, 예전에 잘해준 것도 없고 한데 합격한 이후에도 잘 본 것 같지도 않고, 오랜만에 보면 좋잖아."
엄마는 그렇게 나와 그녀가 관계가 계속 유지되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내가 언젠가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다는 가정하에서 그녀가 나를 계속 곁에 있으면서 나를 도와주는 게, 엄마의 입장에선 아주 이상적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런 확실한 목표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 내가 더 비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또 눈치챈 엄마는 동생에게 말을 흘려보내었다. 약속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는 느낌으로 떠보듯이 말이다.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들은 그녀는 당연스럽게 화를 내었다.
"그런 얘기를 내가 왜 네 동생한테서 들어야 해? 네가 말해주면 되잖아."
뭔가가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다.
계속해서 서로의 의도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물론, 오해만 쌓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부담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에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을 엄마는 동생을 통해서 억지로 일을 만들었고,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 같았다.
"고민하고 있었어. 그래서 아직 말하지 못하고 있었어."
나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이었고, 부담을 주기 싫었고 결코 엄마에게선 순수한 마음으로 너를 보려고 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부만 감추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내 좋을 대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만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녀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공무원 시험 준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물론 들인 시간은 무척이나 안타깝지만 한 우물을 판다고 해서 그 안에서 물이든 기름이든 뭐든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그 한 우물만 파다 보니 그 우물에서 나올 수 없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내 처지였다.
하지만,
"내가 시험을 포기한다고 하면, 가족들이나 유림이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친구에게 내 심정을 이야기했다.
"나로서는 결국 제삼자 입장밖에 안 되겠지만, 유림이는 그래도 상관없어할 것 같은데. 오히려 더 좋아할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부모님은 실망하실 수도 있겠지만, 네가 돈도 벌기 시작하면 또 다르실걸?"
친구는 그렇게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해 주려고 하지만, 결국엔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것 같더라. 이젠 유림이네 어머니도 예전 취급은커녕 걸림돌이 되는 것 마냥 보시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그건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함부로 그렇게 다른 사람의 생각 예측하면 안 돼."
"그래도 내 입장이 그래.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리고 친구는 말했다.
"아니면 잘할 수 있겠다 싶은 걸 해봐. 좋아하는 거라던가. 요리 잘한다며. 직원으로서 좀 여기저기 일하면서 배우다가 개인 사업하는 게 일반적인 방법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게 일반적인 건가."
"이 나라에 자영업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일반적이기도 한 거지."
"그리고 망하는 것도 일반적인 거잖아."
"그러니까 여기저기 일하면서 배우라는 거지."
그렇게 나는 조금씩 공무원에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시험 준비를 손에서 놓치는 않았다. 확실히 마음을 정한 것도 아니었고, 내 생각을 그녀나 부모님에게 전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던 일을 우선 해야 했다.
하지만 점점 다른 일을 해 보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었고, 역시 제일 하고 싶고 자신 있는 요리를 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또 직업이 되면 힘들고 싫어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선택의 길은 상당히 좁은 편이었고 시간도 많은 게 아니었다.
"근데, 그것도 그건데. 너희들은 내가 봤을 땐 너무 대화가 없는 것 같아."
"대화? 어떤 대화?"
"너희들 본심. 아무리 오래된 연인이라고 한들,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당연한 거야. 뭐 오래 만난다고 서로의 마음을 읽는 도사가 되나? 그냥 남들보다 더 잘 읽을 줄 알 뿐이잖아."
"어떤 걸 말해야 하는데."
"뭐 때문에 힘들고, 뭐 때문에 괴롭고, 그렇기에 어떻게 말해줬으면 좋겠고, 서로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없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걸 말하는 건 꽤나 용기가 필요했었다. 어떤 말리 돌아올지, 사실 그녀가 마음이 바뀌어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진심을 아는 게 무서운 것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필요한 것 같다."
"아마 너희들은 그 어떤 변화라도 무서워했던 걸지도 몰라."
그래서,
처음으로 도시락을 싸서 그녀의 직장을 향했다.
나름의 이벤트였다.
매번 그녀가 일이 끝나면 나에게 오듯이, 이번에는 점심시간 전에 그녀에게 막 만들어진 도시락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 더 마음이 정리되면 그때 가서 내 생각을 말하려고 했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기. 이 유림이 찾아왔는데요."
"네? 가족분이신가요?"
"아, 네. 뭐 좀 전해줄 게 있어서요."
"지금 잠깐 자리를 비우긴 했는데, 금방 돌아올 거예요. 아니면 전해주실 거 자리에 놓아 드릴까요?"
"아뇨. 기다릴게요."
나는 대기석에 앉아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금방 돌아올 거라는 말과는 다르게 꽤나 시간이 걸리기 시작했고, 나는 잠시 화장실에 들리기로 했다. 화장실은 꽤나 지저분했는데, 청소를 아직 안 한 건지 소변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었다. 겨울이 다 와가는데 이런 냄새가 나오는 것을 보면 어딘가 고장이 난 것 같은데 살짝 불쾌감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커피 자판기가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갔다. 그 넘어서는 밀폐 되어 있지 않는 흡연실도 존재했는데, 그래도 하나의 방으로 되어 있는 구조이다 보니 그들의 목소리가 살짝 울리면서 들려왔다.
"아까부터 기다리시는 분. 뭐야?"
"아, 유림 씨 찾아왔다던데?"
"유림 씨 복귀하려면 좀 걸리지 않나?"
"나는 다른데 나갔는지 몰랐지. 건물 안에 있는 줄 알았어."
"그래도 곧 돌아올 때도 됐으니까."
"그건 그렇고 딱 봐도 보이지 않냐?"
"뭐가?"
"우리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보니까. 딱 봐도 공시생인 거 보이지 않아?"
"그러지 마. 너도 1년 전엔 공시생이었으면서 무슨."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근데 그렇잖아. 유림 씨 남자 친구가 몇 년 넘게 공시생 준비하고 있다고 그랬었는데. 남자 친구 아냐?"
"그런가. 아 유림 씨 불쌍하네. 최근에는 뭔가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던데."
"남자 친구한테 기 빨리는 거겠지 뭐."
"유림 씨도 사람이 정말 안쓰러울 정도로 좋아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낼 순 없었다. 그녀의 직장에서 난동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직장이었다.
내가 여기서 험담을 한 것 때문에 화를 내고 사과받는다고 해서, 그녀의 일상인 이곳의 생활이 좋아질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로 인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어차피 남 이야기는 어딜 가서 든 하는 이야기다.
그 후 10분이 더 지나서 그녀가 복귀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확실히 다시 보니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많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왜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런 걸 알게 되었는지 그녀의 남자 친구로서 회의감이 들었다.
"밥 먹었어?"
한 겨울인데도 그녀는 일에 지친 건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웬일이야? 이 점심시간에."
"그냥 좀. 보고 싶어서. 도시락 싸왔어."
도시락이 왠지 식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맛있게 먹어줬으면 했다.
"네꺼는?"
"나? 나는 괜찮아. 그냥 이거 주려고 왔어."
나는 그렇게 건네주면서 살짝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장갑이라도 끼고 다녔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도 않는 것인지 손이 차갑다고 느끼기 전에 건조하다는 것부터 느끼게 되었다.
"나 갈게."
나는 그렇게 손을 한 번 흔들고 바로 돌아섰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간다.
그날 밤, 그녀에게서 전화 한 통이 왔었다.
왠지 훌쩍이는 게, 무슨 이유인지 한바탕 울었던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 날은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 또한 술을 마셔서 그저 그런 목소리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겨우 남들 말에 귀 기울여서 끙끙 앓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들은 결국엔 사실이기에 마냥 부정할 순 없었다.
나 때문에 그녀는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고 행복할 수 있겠지만, 나 때문에 그러지도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나에게 말하지 못할 고민으로 어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가능성도 다 열려 있었다. 지금으로선 안 좋은 쪽으로 대부분이었지만.
하지만 욕심내고 싶었다. 그래도 그녀와 계속 가고 싶었다. 주변의 시선이든 뭐든 다 상관없이, 그저 그녀와 행복한 날을 꿈꾸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건 분명 그런 내 마음이 강하고 더 조심스러울수록 그녀에겐 '족쇄'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이별이라는 게 얼마나 간단하고 갑작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인지.
그녀의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직감이 오는 때가 있었다.
'그녀가 헤어지자고 말을 하려고 하는구나.'
이미 그녀는 나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순간 나의 마음을 대변하려던 마음을 전부 접었다.
어쩌면 그때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대화를 진즉에 해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장 아쉬웠다.
결국 나는 다시 공무원 시험을 치기로 했고, 2년을 더 고생하고서야 합격을 하게 되었다.
일상이 크게 바뀌는 건 없었다.
내가 공부하던 시간에 일을 하는 것뿐이고, 돈만 쓰는 게 아니라 돈도 벌고 여가시간도 늘고 말이다. 다만 그렇게 수년을 투자하고 크게 바뀐 것 하나.
그녀는 이제 없다.
저의 주변에도 공무원시험 준비 때문에 많은 걸 포기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노력을 한다고 해서 노력한 만큼 무조건 결과가 나타날 거라는 말은 할 수 없지만, 그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노력을 잊지 않고 응원할 겁니다. 부디 그 분들에게 승전보를 들려줄 수 있는 결과를 얻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