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살았다.
부모님과는 돈을 벌기 위해서 지역자체가 다른 곳에서 살게 된 적도 있었고, 같이 살게 된 때에도 내가 아침에 일어나기도 전에 출근을 했기 때문에, 나를 깨워 준 사람은 할머니였다.
동생은 물론이고 10대의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늘 할머니가 나와 동생을 챙겨주셨다. 그렇게 늘 집에서는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이다 보니 나 또한 할머니와 동생을 챙기는데 습관이 들여졌었고, 학교의 수행평가로 UN공원에 갔을 때에도 동생을 데리고 간 적도 있었고, 친구들과 재미있는 게임을 발견하면 동생과 함께 같이 게임을 하러 다시 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담배를 파는 가게에 전화기를 빌려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길을 잃을 일이 없다. 지금은 스마트폰이면 뭐든 다 되니까. 2000년대 초반이었던 만큼 불편한이 많았던 그 시절에는 늘 가족과 함께하는 게 안정감을 느꼈다.
할머니는 내가 직장을 얻었을 때 돌아가셨다. 그리고 동생 또한 취업을 위해서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을 했고, 기껏 집안 형편이 나아지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을 땐, 우리 가족은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참 내가 나이를 확실히 먹고 있구나를 실감할 때가 있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사회에서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우고, 낭만보다는 현실에 더 몸이 절여지고 있었을 때, 그저 동생과 함께 길거리를 뛰어나가고 게임을 하고 할머니와 같이 볶음밥을 먹을 때가 즐거웠던 것을 떠올리게 되었을 땐, 이제는 그런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감수성을 배우고 있었다.
현실의 고달픔에 절여져서 그런 것인지, 슬픈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고, 어린 시절엔 이해하지 못한 것들을 점점 이해하고 공감하고 눈물 흘리게 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땐, 그렇게 순수하게 어린 시절의 활짝 웃는 얼굴을 할 수 없었던 게, 나도 참 나이를 확실히 먹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만큼 세월이 지나갔다는 뜻이고, 뒤로 흘려보낸 추억을 다시 되돌리수 없으며 그리움을 더 크게 만들 뿐이었다.
32살의 형.
29살의 동생.
과연 내가 재미있는 오락기를 발견했다고 동생과 같이 하고 싶다는 마음에 전화를 해서 오락실로 부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싶었다. 동생 또한 서울에서 자기 일을 하느라 지쳐가고, 나 또한 내 일을 하는데만 지쳐 놀 것을 찾아다니는 것보단 쉬는 날엔 쉬는 데에 최선이었다.
그저 살아가는 데에 바쁘고 힘들어가고 있었기에 지나간 어린 시절, 더 한 살 한 살 어렸던 시절의 추억을 그저 낭만으로서 그리워지고 있던게, 나로선 그게 나이를 먹는 것을 실감시킨다.
그나마 한 가지 꿈이 생기는 건, 그랬던 어린 추억 같은 즐거움을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다른 형식으로라도 물려주고 싶다는 기분이었다.
가족의 소중함.
그때만의 남길 수 있는 행복한 추억.
그리고 나를 키워준 부모님이 계속 건강하고 오래 계셨으면 하는 마음까지.
그렇게 말로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