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래의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했으면'이라는 도서로 수번의 교정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많은 관심 바라겠습니다!
그녀의 솔직한 고백은
나를 더 나아가게 할 수도,
망설이게 할 수도 있다.
법적 성인이 된다는 건,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다지 별거 없는 경계선이었다.
나 스스로가 무엇이 변화를 했는지 알 수 없었고, 그저 담배나 술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을 뿐이었지, 사람들이 나를 어른으로 취급해 주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어른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른으로 거듭날 기회를 주려는 건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되었다.
대학 새내기가 되고 MT에서 친구도 늘리고 단짝도 만들고 재미있게 보내고 있던 도중, 어깨가 습관성 탈골로 인해 현역으로 갈지 공익근무요원으로 빠질지 병영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군대라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는데, 그곳을 보내려고 하는 병무청에 계속 들락날락하는 건 스트레스를 현실화시켜 얻어 받는 기분이었다. 틈만 나면 어떤 서류를 제출하라고 하고, 그 서류를 제출하면 또다시 나를 불러내 검사를 받게 하고 또 서류를 요구했다. 그러다 보면 괜히 신경질이 나기도 했다.
나는 그 신경질을 여자친구와 만나면서 풀어나갔다. 그녀와 무언가를 하면서 불편한 건 잊을 수가 있었고, 모든 것이 즐거운 시간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 친구는 한 가지를 나에게 고백을 했다.
"나 사실 어릴 적에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었어."
굉장히 차분하게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 말은 주변에 사람이 있더라도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비밀 신호 같은 느낌이었다.
"어?"
순간적으로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잠자코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거짓말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상세하게 그만큼 잊지 못할, 어릴 적 기억이라고 강요하듯이.
그녀는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귀가하고 집에 도착하여 집을 보고 있던 중에 일어난 사고라고 했다. 작은 동네라 소문이 크게 나지 않았다. 그저 그 동네를 떠날 뿐이었다. 뉴스에도 나오지도 않았고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 숨겨왔다고 했다.
"이 사람이야."
그리고 지금 복역 중인 그 가해자의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저 동네에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남성의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이 사진을 챙기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그녀는 온몸을 떨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솔직히 이런 일에 나는 어떻게 해 줘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다독이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해 준 것에 대한 대단함을 표출해 줘야 했다. 그저 "그동안 힘들었겠다." 하며 공감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입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싫은 게 아니라, 생각도 못해 본 일이라, 내 주변에서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던 거다. 그런 나와는 달리 그녀는 침착했다. 나에게 울고불고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주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다독이는 것도 왠지 어려웠다. 화가 나기도 하고 동조도 됐지만, 무엇 하나 해 줄 수가 없었다.
그저 내가 옆으로 자리를 옮겨 가볍게 다독이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용기에 대해서 칭찬하듯 어깨를 감쌌다.
"그런 말, 나에게 해 줘도 괜찮았어?"
"응, 너도 언젠간 알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을 했었어. 내가 싫으면 싫다고 해도 괜찮아."
그녀가 싫은 일은 절대 없었다.
나쁜 건 그 녀석인데, 왜 그녀를 싫어해야 하는 건가?
화가 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침착해졌다.
하지만, 솔직히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한 걸까?'
늦게 말했다고 따지고 싶은 게 아니었다. 차라리 말하지 말라고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왜 지금의 타이밍에 그런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나온 건지 알고 싶었다.
무언가의 계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묻지 못했다. 묻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는 더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그저 괜찮다고 다독이기만 했다. 이렇게 그녀가 그런 고백을 했다는 건, 나를 사랑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사회에 나가면서 제일 처음 배운 것은 '책임감'에 대해서였다.
내가 할 일은 누군가가 해결해 주지 않는다. 돈을 주거나 그에 맞대응할 만한 것을 내밀면 모를까. 스스로 처리할 건 스스로 해야 했다. 언제까지 엄마 아빠가 다 해결해 줄 순 없으니까.
여자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일 느꼈던 것 또한 '책임감'이었다.
더 이상 여자친구가 괴로울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만큼 그녀와의 성관계도 조심하게 다가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여자친구가 나에게 그런 고백을 한 것은 나에게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여자친구를 어떻게 대해줘야 하는 지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곤 했다. 생각보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껴안아 준다던지, 괜찮다고 다독인다던지, 공감해준다던지 좋은 말만 해주지만, 현실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평생의 악몽으로 가져가야 할 일을 한 순간으로 치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처럼 내가 공감해 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장애물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맞서는 건, 훨씬 크다기보다는 어떤 형체를 가진 장애물인지, 뛰어넘어야 하는 건지, 몸을 숙여 통과를 해야 하는 건지, 빗겨나가야 하는 건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그녀를 대하는 대에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던 와중, 그녀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자신을 불편해한다고 느껴버리고 말았다. 즉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야. 그저 조금 조심스러워졌을 뿐이야."
"나는 그게 싫다는 거야.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서 너한테 말한 거라고. 솔직히 너한테 말한 거 후회하고 있어."
그녀는 그저 자신의 과거 중 말해야 할 것을 말해줬을 뿐이라고 숨겨야 할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저 묵묵히 아무런 변함없이 "그랬구나." 하면서 받아주길 바랐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을 닫아내며 그녀가 말하는 것을 계속 들었다.
"그저 다독인다거나, 공감해준다고 해서 나를 위로하는 게 아니야.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별다를 게 없이 나를 대해주길 바랐어."
결과적으로 그랬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에, 그런 아픔이 있더라도 위로하기보다는, 그래도 아무런 상관없이 너를 사랑한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그게, 그녀의 바람이었다. 나는 쓸데없이 나만의 책임감을 앞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서, 이해를 해 주기 바란다는 식으로 말해서 미안해. 내가 이기적인 걸지도 몰라. 너를 시험했던 걸지도 모르고. 기분 나쁘지? 사실 이런 말을 추가적으로 하는 게, 더 겁이 났거든."
그러면서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하듯 했다. 그녀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내가 아직 그녀에 대해서 잘 몰랐을 뿐이었는데.
나는 꾹 참아 왔던 목구멍을 풀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나도 하나만 물을게, 나한테 그 말을 했다는 걸 후회한다는 건 무슨 뜻이야?"
그녀는 분명 고백을 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납득을 하지 못하고 뒷 말을 잘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하기 꺼려했다.
사실 뭔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난 그녀가 정말로 숨김없이 솔직하길 바랐다. 아무리 무섭고 힘들다고 하더라도. 나는 모든 것을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 사람이, 몇 주 후면 출소하게 될 거야. 그래서, 무서워서 그랬어."
그 사람이 다시 나온다.
그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말하는 거였다. 그가 감옥에 들어갔으니까, 혹시나 그녀에게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고, 그녀는 겁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지켜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피해가 나에게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인해 자신의 고통을 나에게 주는 게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왜 네가 겁을 먹고 그래."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잘못한 건 네가 아닌데."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용기를 건네받은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어렵게 나에게 건넨 말이었을지. 여자로서 얼마나 수치심을 밟아내고 나에게 고백을 했을지, 그 용기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무거운 고백이었다. 그만큼 나를 믿어줬기에, 그 믿음에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나는 충분히 그만큼의 책임감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었다. 그건 나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때 상처를 받았을 때와 지금은 전혀 다르다. 그때는 내가 있어주지 못했고, 지금은 내가 그녀의 곁에 있어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나에게 의지하고자, 믿음을 갖고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충분히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걸 억지로 꺼내면서 말이다.
정말 대단한 용기였다.
나는 내 어깨가 다시 한번 탈골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켜줘야겠다고, 그녀의 용기에 저버릴 수 없었다. 그게 나의 책임감이었다.
그녀의 상처를, '우리'로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우리들의 방법은, 그녀의 용기와 그에 맞는 나의 책임감이었다. 이건 한 순간으로 끝날 게 아니라, 그녀와 함께할 모든 시간에 기여해야 할 강한 것이다. 그게 내가 찾은 그녀의 위로 방법이었다.
분명 그런 고백을 한다는 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수없이 상상하고 난 후의 결심한 한마디였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뻔뻔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짓을 하고도, 꼬리 치는 여자가 잘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돈을 던져 주며 난리 치지 말라고도 한다. 오히려 성폭행자를 지지하면서 경찰이 된 사람도 있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결혼식에 초대를 하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사람은 뻔뻔해야 세상을 살아가나 했다. 그건 용기가 아니었다. 그저 막돼먹은 것뿐이다. 무식하기에 용감한 것도 몰라 용기를 가진 것처럼, 그런 사람들도 그저 상대할 만한, 가르칠 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적반하장에 가까운 녀석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을까. 적반하장은 잘못한 사람이 되려 누군가를 자책하는, 오히려 자신을 위험 속에 스스로 들어가려 하는 짓이다. 누가 봐도 잘못했는데, 자기 혼자 잘했다 한들, 혼자가 되는 건 적반하장 그 녀석뿐이다.
그들에게 열을 낼 필요도 없다. 혼자 싸울 필요도 없다. 적반하장에 편을 들어줄 사람은 그런 사람들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 녀석들을 적대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겁을 낼 필요가 없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용기를 낸다면 반드시 주변에는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용기는, 겁을 준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생각할 때 더 강하게 가질 수 있다.
#2. '그 사람과 자고 싶은 타이밍' 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