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생각법>
현대 미술과 사랑에 빠진 페기 구겐하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의 주인은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 페기 구겐하임이다. 본명은 마거릿 페기 구겐하임(Marguerite Peggy Guggenheim)으로, 1898년에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페기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가지 못하고 가정교사로부터 교육받았다. 그녀의 아버지 벤저민 구겐하임이 딸에게 고상한 취향을 가르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벤저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은 1912년, 그 유명한 타이태닉호 침몰 사건으로 사망한다. 그는 침몰 당시 선원에게 구명조끼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와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라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3등 객실의 승객은 25%밖에 살아남지 못한 것에 비해 1등 객실 승객의 절반 이상이 살아남았다는 기록과 비견해 보면, 벤저민의 ‘명예로운’ 죽음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벤저민은 사망 전에 형제들과의 동업에서 손을 떼고 막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과 동시에 집안의 막대한 재산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어린 시절 ‘구겐하임의 가난한 친척’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페기는 스물한 살에 구겐하임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는다.
페기는 다음 해 프랑스 파리로 떠났고 그곳에서 현대 미술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20년의 프랑스는 문예 부흥기였던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가 거의 끝나 곳곳에서 새로운 문화 조류나 경향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움직임 속에서 예술을 좇는 수많은 예술가와 비평가들은 거리로 나왔다. 페기는 이들과 교류하며 작업실에 초대받거나 전시회에 참석하는 등 작품에 대한 안목을 높였다. 특히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에게서 현대 미술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배웠다.
1934년 남편이 사망하자 페기는 외로움에서 비롯된 에너지를 모조리 미술계에 투자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1938년 런던에 ‘구겐하임 죈(Guggenheim Jeune) 갤러리’를 열어 본격적인 작품 컬렉션에 나섰다.
전쟁의 불길 속에서 현대 미술을 구해 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예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각자 몸도 건사하기 힘든 와중에 사치품에 속했던 미술 작품들의 값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특히 당시 빛을 보지 못했던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들은 심지어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또한, 유대계 예술가를 포함해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 수많은 예술가마저 위험에 처했다. 페기 그 자신도 역시 유대인이었으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작품 수집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해 두었던 작품을 하루에 한 점씩, 모조리 사들이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그녀가 마음먹지 않아도 전쟁 중에 미술품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그녀의 회고에 의하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침대로 그림을 가져왔다.’ 또한, 페기는 전쟁으로 위기에 몰린 예술가들을 유럽에서 탈출시키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섰다. 예술가 대부분은 가난했기 때문에 피난할 여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페기는 시인이자 초현실주의 미술평론가이기도 했던 앙드레 브르통, 화가이자 판화가였던 마르크 샤갈 등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가 미국으로 무사히 건너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뉴욕으로 건너가기 전, 페기는 루브르에 자신이 사들인 작품들을 보관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다. 당시의 관점으로 그녀가 수집했던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작품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가치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페기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망스럽게도 루브르 박물관 측은 내가 가진 그림은 보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공간을 내주기를 거절했다. 그들이 보존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그림은 칸딘스키 작품 한 점, 클레와 피카비아 작품 몇 점, 브라크의 입체주의 작품 한 점, 후안 그리스 작품 한 점, 레제 작품 한 점, …….”
루브르에 거절당한 미술품 중 일부는 꽁꽁 싸맨 채 평범한 짐으로 위장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페기는 뉴욕에서 ‘금세기 예술 갤러리(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를 열어 이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페기는 당시 건축가 프레데릭 존 키슬러(Frederick John Kiesler)에게 갤러리 내부의 작품 설치를 포함하여 전반적인 인테리어를 맡겼다.
키슬러는 건축가임과 동시에 디자이너이자 조각가이기도 했다. 키슬러는 작품들을 액자에 가두지 말라는 페기의 요구조차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예술가적 기질을 발휘하여 페기의 갤러리를 자신의 또 다른 작품으로 만들었다.
페기가 열었던 금세기 예술 갤러리의 현장과 작품들
갤러리 자체가 작품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작가와 작품, 관람객 사이에는 벽이 없어졌고, 누구나 와서 작품을 감상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예술인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작품들은 물론이요, 갤러리의 연출 방식, 그 분위기가 여타 갤러리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페기는 나치를 피해 뉴욕으로 피난 온 샤갈,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쿠르트 셀리히만 등과 미국의 신생 화가 잭슨 폴락, 마크 로스코 등을 위해 만남을 주선했다.
또한, 페기는 공모전을 열어 작가를 발굴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잭슨 폴락이다. 당시 아무런 의미 없이 물감을 흩뿌리는 기법은 몇몇 작품에서 사용되기는 했지만, 폴락처럼 캔버스 전체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채우는 예술가는 없었다. 폴락은 심지어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 담배를 물고 뛰어다니며 작업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을 두고 미술평론계에서는 이것이 예술이냐 아니냐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페기는 폴락을 둘러싼 논란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에게 생활비까지 주며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그녀의 후원 덕분에 잭슨 폴락은 현재, 유럽보다 뒤처져 있었던 미국 미술을 오늘날의 위치로 끌어올린 공신으로 여겨진다. 또한, 결과인 작품뿐만 아니라 그 과정까지 예술로 인식하는 ‘액션 페인팅’의 ‘개념미술’을 창시했다고 평가된다.
컬렉터의 의무, 보물을 보존하여 세상에 보이는 것
“20세기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천재를 선사했고, 더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좋은 밭을 만들기 위해선 이따금 놀려 두어야 하지 않는가! 오늘날 예술가들은 독창적이라기에는 너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런 그림들은 더는 그림이 아니다. 지금으로써는 20세기가 배출해 낸 이들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 지금은 창작의 시대가 아니라 수집의 시대이다.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보물을 보존해 대중에게 보여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페기 구겐하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현대 미술의 전설적인 컬렉터다. 그녀는 단순히 돈벌이로서 미술 작품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현대 미술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