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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9. 2016

10. 흑공주와의 추억, 빠이

<여행하는 보헤미안>


빠이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에서 마주한 들판 

상처투성이인 내가 사람과 어울리는 걸 이리도 좋아할 줄은 몰랐다.

나른하고 편안했다. 시간이 거북이마냥 엉금엉금 기어갔다. 딱히 볼 만한 게 그리 많지 않건만 왜 이리 좋은 건지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오묘했다. 그래서일까. 스님이 넌지시 던진 말은 가슴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빠이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곳이다.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빠이(Pai). 이곳에서 얻은 소중한 추억들을 모조리 세탁기에 넣고 수차례 돌려도 그중 하나는 절대 퇴색하지 않을 것만 같다. 흑공주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스 녹차, 초콜릿 케이크, 파파야가 담긴 비닐봉지를 슬그머니 그녀에게 건넸다.

“버스 안에서 먹어.”
“오빠, 제가 사줘야 하는데…….”
“아냐. 얼마 안 돼.”

그녀가 나를 살포시 껴안았다.

“괜히 저 때문에 기다리지 마세요. 가세요, 오빠. 오빠 가는 거 보고 갈게요.”

그녀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애써 돌렸다. 가슴이 시렸다. 봄이 가고 겨울이 다가온 듯했다. 일주일 전 그녀가 숙소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나무에 그물을 달아맨 해먹(Hammock)에 누워 있던 내게 남동생 둘이 나지막이 말했다.

“형, 형수님 오셨는데요.”
“괜찮은데요. 형이랑 어울리는 거 같아요.”
“형, 스쿠터 가르쳐주면 절대 안 돼요. 만날 뒤에 태우고 다녀요.”
“가끔 급브레이크를 잡아요.”

빠이 여행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스쿠터!


숫자 762는 빠이를 상징한다. 치앙마이에서 빠이까지 이어지는 커브 길이 762개이기 때문.


그녀는 스님과 한참 대화를 나눈 뒤 휴게실로 들어왔다. 뚜렷한 이목구비,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늘씬하면서도 탄력 있는 몸매가 남미 쪽 미인을 연상케 했다.

“세계 여행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앞으로 많은 조언 부탁드릴게요.”

제법 마음에 들었기에 거꾸로 답했다.

“싫은데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나는 늘 그녀와 함께했다. 빠이 캐니언(Pai Canyon), 문 빌리지(Moon village), 노천온천, 메모리얼 브리지(Memorial Bridge), 아기자기한 카페 등 여러 곳을 누볐다.

빠이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곳, 문 빌리지(Moon village). 일본 히피들이 모여 살았던 작은 마을이다.


문 빌리지(Moon village) 입구와 내부


현재는 족장 홀로 남아 텅 빈 마을을 지키고 있다. 족장은 일본인이 아니라 태국인이다. 마을에 화석처럼 남은 그림 한 점을 사진에 담았다.


“7년 동안 비서로 일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제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보고 싶어요. 6개월 열심히 일하고 6개월 여행 가는 그런 직업 어디 없나요?”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여행안내서 같이 만들자고 꼬드겨볼까, 아니면 제주도로 날아가서 함께 결혼사진 촬영을? 뭔가 대책이 필요한데…….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왓 프라탓 도이수텝(Wat Phra that Doi Suthep) : 태국, 치앙마이에 있는 불교 사원


그녀와 나는 치앙마이(Chiang Mai)에서 재회했다. 우연히 일정이 맞았다. 왠지 모르게 그녀는 예전보다 더 예뻐 보였다. 역시 내 안목은 녹슬지 않았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선데이 마켓을 둘러보았다. 조그만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길거리 음식으로 저녁을 때웠다. 실은 레스토랑에 가서 근사한 음식을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이 훗날 더 애틋한 기억으로 남을 거란 걸 순간 간파했다. 레스토랑은 어딜 가도 널려 있지만, 이곳은 특별했다. 왜 이럴 때 하필 시간은 토끼처럼 빨리 달리는 걸까. 버튼 하나를 누름과 동시에 딱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전에 예약해둔 툭툭(Tuk Tuk), 태국의 삼륜차 택시이 등장했다. 두 번째 이별이었다. 우린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잘 지내.”
“잘 가세요.”
“아, 맞다. 이거. 남은 돈이야. 얼마 안 되지만 밥 사 먹어.”

한사코 사양하는 그녀의 손에 지폐를 쥐여주었다. 작전 성공이다. 일부러 ATM기에서 뽑은 돈이었다.

일전에 어떤 누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혼자 여행하면 누구나 그렇듯 외로워져. 그걸 못 참고 낯선 상대에게 기댈 때 문제가 발생하곤 하지.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닌데 착각할 수 있어.”

나는 지금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그때그때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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