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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30. 2016

09. 래리 킹, 대화로 모든 것을 해결하라.

<천재의 생각법>

“Keep it simple Stupid!”

   
줄이면 KISS다. 래리 킹은 대중 연설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짧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덟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절도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고, 파산 선고를 받은 적도 있지만 여든이 넘은 래리 킹은 지금도 현역에서 활동한다. 사람들은 그를 ‘대화의 신’이라고 부른다.    

 래리 킹은 1933년 11월 19일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로렌스 하비 자이거였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어린 킹에게 엄격했다.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이라 할 정도로 식사시간에 그의 아버지는 항상 래리 킹을 훈육했다. 하지만 교육에 열정적이던 그의 아버지는 래리 킹이 아홉 살 때 사망했고, 킹은 그 이후로 책과 공부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 
     
아버지의 죽음 후 그의 가족은 이모의 도움을 받아 브루클린으로 이사 가게 된다. 당시 정부의 구호금으로 살림을 꾸려나가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그의 어머니는 그들에게 항상 가능한 한 가장 좋은 것들을 먹이고 입히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가 킹에게 남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모두 채워 넣을 수는 없었다.     


라디오에 빠져 살던 어린 시절의 래리 킹

그 무렵 래리 킹이 빠져 있었던 것은 라디오였다. 그는 언제 무슨 프로그램을 하는지 줄줄 꿰고 다닐 정도로 라디오 광이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도 했다. 그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길모퉁이에 서서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특징을 중계하고는 했다. 또한, 에베츠 필드에서 야구 경기가 벌어질 때면 외야석에 앉아 그 시합을 ‘중계방송’했다. 
     
그는 그만의 노트를 뒤적이며 혼자만의 ‘중계방송’을 마친 뒤, 친구들에게 돌아와 그 시합에 관한 모든 것을 다시 중계했다. 킹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 허브 코헨은 “래리가 본 시합이 2시간 10분짜리였다면, 래리가 우리에게 중계한 시간도 2시간 10분이었다.”고 말한다. 그 시절 킹의 별명은 ‘떠벌이’였다.
     

래리 킹(Larry King)


네모난 뿔테 안경과 멜빵을 입고 나오는 사회자

<래리 킹 라이브>는 전형적인 시사 토크 쇼로, 대부분의 게스트는 스튜디오에 직접 나와 킹과 대화를 했다. 네모난 뿔테 안경과 멜빵이 상징인 킹은 언제나 면담자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눈을 맞췄다. 킹은 언젠가 윌 로저스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무지하다. 다만 그 무지한 분야가 서로 다를 뿐이다.” 킹은 ‘모든 사람이 어떤 일에 관해서는 저마다 전문가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잘 이야기할 수 있는 분야가 있고 그것에 관해 대화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인터뷰어는 면담자가 무엇을 즐겁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순간순간 잡아내 인터뷰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킹의 경우, 그 수단은 경청이었다. 래리 킹의 인터뷰는 정적이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인터뷰 스타일은 출연자의 솔직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곧바로 핵심으로 들어가는 래리 킹의 화법

킹은 이렇게 상대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면담자의 지위와 관계없이 곧바로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물론 질문지는 손에 쥐어져 있지만 킹은 질문지에 구애받지 않았다. 면담자의 대답에 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래리 킹 라이브>는 25년의 방송 기간 언제나 사람들에게 대화의 화두를 던졌다. 
     
1992년 대통령 선거 기간, 댄 퀘일 부통령이 초청자로 출연했다. 낙태에 관한 법령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는 낙태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킹은 불쑥 “그렇다면 귀하의 따님이 낙태하러 가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라고 물었다. 갑작스런 킹의 질문에 당황한 퀘일은 그만 얼떨결에 자신의 딸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 존중한다고 대답했다. 퀘일의 대답은 단숨에 뉴스거리가 되었다. 당시 ‘낙태’는 뜨거운 감자였고, 보수적인 공화당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발표한 의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때문에 공화당의 신뢰도는 떨어졌고, 선거에서도 패했다. 만약 킹이 퀘일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공화당의 이미지는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래리 킹의 인터뷰는 편안하고 간결했지만 이렇듯 날카롭고 직설적이었다. 때로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하고 허술한 부분을 지적하기도 하고, 출연자와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시청자들은 킹의 질문을 통해 유명인들과 대화하고 때로는 감동하고 분노하며, 통쾌해 했다.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상대도 연다.

래리 킹은 대학 교육도 받지 못했고 호감 가는 외모를 가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멜빵바지에 네모난 뿔테 안경이라는 그만의 이미지를 창조해 냈고, 항상 몸을 기울여 경청하는 태도와 솔직한 화술로 면담자들이 속마음에 감추고 있었던 이야기를 쏟아 놓게 하였다. 자기 자신부터 솔직할 줄 아는 킹의 태도는 화제 인물의 의외의 모습이나 숨겨 왔던 심경을 꺼낼 수 있었다.
     
그는 누구나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킹은 대화를 시작할 때 언제나 자신에 관한 것을 상대에게 털어놓기 때문이다. 먼저 열어야 상대도 연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지 알았다. 또한, 그는 대중이 어떤 것을 궁금해하는지 알았다. 이러한 질문을 무례하지 않게 들리도록 하는 것은 래리 킹만의 능력일 것이다. 웃기거나 자극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편안한 토크 쇼 <래리 킹 라이브>는 오랜 시간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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