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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Dec 01. 2016

10. 학력파괴의 신화를 쓰다._김완기 인사수석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고졸과 9급은 한국의 공직사회에서 여전히 ‘마이너리티’를 상징하는 굴레다. 지금까지 그들은 좋은 학벌의 고시 출신 동료들이 주요 보직을 차지하거나 승진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능력을 인정받아도 국·과장을 넘어서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부산상고 출신으로 ‘고졸 푸대접’과 ‘학벌주의’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9급 공채 공무원이 최소 진급 소요연수를 채우고 초고속 승진을 한다 해도 직업공무원의 꽃이라는 1급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25년이 걸린다. 하지만 중앙인사위원회에 따르면 실제로는 50년이 넘게 걸리는 것으로 조사됐으니 ‘고졸 신화’라는 표현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연배의 행정고시 출신 차관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국내 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하는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는다. 5급 사무관으로 시작해서 보통 25년 안팎에 1급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고졸 신화’를 만든 주인공들 가운데는 중·고교 시절 명석한 두뇌로 두각을 나타냈으나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한 이들이 많다.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가장 말단인 9급부터 시작해 1급 또는 차관급에 오르기까지는 대략 35년 정도가 걸린다. 학벌로 인해 10년 정도의 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2007년 8월 31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기사를 살펴보자.

한국사회의 학벌주의는 어느 정도 심화돼 있을까. 대표적인 파워 집단으로 꼽히는 고위공직자들과 CEO들의 학력분포를 꼼꼼히 살펴보면 학벌의 ‘벽’이 길고도 높게 형성돼 있음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본지가 한국공공자치연구원의 조사 자료를 토대로 공공기관의 사장급, 정부부처의 장급, 지방자치단체장, 상장사협의회 소속 CEO 등 총 1,417명의 학력을 종합적으로 조사한 결과, 대졸 이상 학력자는 95.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파워 인물 10명 중 9.57명이 대졸 이상 학력자라는 것이다. 반면 고졸 이하는 단 61명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정확하게 ‘4.3%’의 미미한 점유율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학벌 편중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보여주는 결과다.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 400대 기업에서 중·고졸 또는 대학중퇴자는 전체의 15% 선이다. 대만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중소기업 CEO들 중 30%도 대학졸업장이 없다. 우리보다 적게는 4배 많게는 7배 이상 월등한 수치다. (중략)

그럼 재계는 어떨까. 공교롭게도 재계 또한 ‘학력이 극복하기 힘든 신분으로 자리 잡아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상장사협의회 소속 CEO 1,005명 중 대졸 이상은 983명(97.8%)에 달하는 반면 고졸 이하 학력자는 22명에 그쳤다. 2%를 갓 넘는 수준이다. 상장사 임원들도 ‘대동소이’하다. 675개 상장법인의 임원 1만 1,602명 가운데 석·박사는 32.3%(3,753명), 대졸은 64.3%(7,465명)로 집계됐다. 최종 학력이 고졸 이하인 임원은 ‘미미한’ 수치인 3.3%(384명)에 머무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학력 지상주의’의 풍토, ‘실력’보다 대학 ‘간판’을 중시하는 학벌 사회가 개선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이다. 바로 이 해에는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 위조사건까지 발생하며 학위 검증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쳤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는 인내와 끈기만으로 견고한 학벌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성공을 이룬 주인공들도 적지 않다. 학력을 극복한 신화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들은 간판을 뛰어넘는 실력으로 사회의 편차를 줄이는 우리 시대의 나침반이다.

2004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은 프랑스 공식방문 중 동포들과의 간담회에서 “지금 한국에서 누가 주류냐? 옛날에는 언제나 위에 있고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력으로 경쟁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주류로 등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참여정부 5년은 주류세력 교체의 시기, 간판이 아니라 능력이 대접받도록 노력했던 시기였다. ‘마이너리티’의 중용은 매너리즘에 빠진 공무원 사회에 신선한 자극제로 작용했다. 과거 정부에서는 고시 기수, 나이 등에 밀려 공직을 끝냈을 ‘마이너리티’들이 직업공무원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1급’뿐만 아니라 장·차관을 바라볼 수 있는 길까지 열린 것이다.

청와대 인사수석 김완기는 최종 학력이 ‘광주고 졸업’이었다. 학력 차별이 엄존하는 한국 사회에서 달랑 고등학교 졸업장 하나만으로 참여정부의 인사일지를 새로 쓰게 된 자랑스러운 성공담을 들여다보자.

2005년 1월 20일 이기준 교육부총리에 대한 부실 인사검증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정찬용 인사수석의 후임에 김완기 소청심사위원장이 임명됐다. 청와대는 “김완기 인사수석은 지방과 중앙부처의 주요 보직을 거쳐 식견이 높으며 일처리가 신중하고 인간관계도 원만, 인사수석의 직무를 잘 수행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김완기 수석은 이에 앞서 호남 인사수석, 영남 민정수석 구도가 유지되면서 주요 후보군으로 거론되던 이학영 한국 YMCA 사무총장(19~20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윤장현 광주 YMCA 이사장(민선 6기 광주광역시장) 등과 함께 노 대통령에게 추천됐다.

김완기 소청심사위원장은 광주·전남 공무원들에겐 ‘신화’로 통하는 인물. 고졸 학력에도 불구하고 전남도청 서기보(9급)에서 차관급까지 올라온 입지전적인 경력 때문이었다. 또한 광주·전남지역 시민사회에서는 출향 인사 중 맏형으로 통하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시민사회와 공무원사회를 아우를 수 있는 장점까지 활용하게 됐다. 공직사회는 그의 인사수석 발탁을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1월 19일 관저 아침식사 자리에 노무현 대통령은 정찬용 인사수석과 함께 김완기 소청심사위원장을 불렀다. 마지막 면접인 셈이었다.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인사수석은 대통령에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하는데, 김완기 위원장은 평생 공무원으로 살아와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당시 청와대에는 비서실과 정책실로 칸막이 구분이 돼 있어서 비서실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홍보수석, 인사수석 등 정무참모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정책실은 경제정책수석, 사회정책수석 등 정책참모들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인사수석은 정무참모로서 정무적인 판단에 능해야 하고, 판단이 설 경우 대통령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이런 우려를 나타낸 것이었다.

“저는 고졸로서 그간 대학 학력을 보충할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벌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겠다는 소신과 오기로 임했습니다. 저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진정한 보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완기 위원장의 당당하고 거침없는 답변이었다. 김완기의 인생궤적은 노무현 대통령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를 면접하는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김완기의 과거 역정에 대해 자세하게 물으며 최종 결심을 굳힌 것 같다.

김완기는 그저 일만 잘하는 공무원이 아니었다. 유신 직전에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13~14대 국회의원) 등 재야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전남대 학생운동권에서 부정기적으로 배포했던 〈녹두〉 〈함성〉과 같은 지하유인물의 필경과 등사를 몰래 해주었다. 서슬 퍼런 유신시절,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돼 도피 중이던 고 조영래 변호사를 집에 숨겨줄 만큼 강단도 있었다.

정찬용 전 수석 발탁의 전형에 따라 인사수석의 기본 요건인 ‘호남지역 출신’에 ‘광주·전남 시민사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게다가 인생 역정까지 여러 면에서 자신을 쏙 빼닮은 김완기를 노무현 대통령은 선뜻 낙점했다. ‘고시 출신과 학벌 위주의 공직 인사 관행을 깨고 실력 위주로 등용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호남 지역사회의 재야인사들을 제치고 관료 출신인 그를 발탁했을 만큼 김완기의 불편부당한 업무 처리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것이다.

1월 20일, 김완기 수석은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인사수석에 대한 언론의 평가가 아주 좋아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공직사회에서 다듬어온 기준이 있으니 사심 없이 하시면 잘하실 겁니다.”라고 당부했다.

김완기는 전남 곡성 출신으로 명문 광주 동중을 졸업하고 광주고에 수석 입학할 때까지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지역에서는 상당히 알아주던 수재였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소년 가장이 되어 단칸 셋방에서 병약한 모친과 2남 4녀의 동생들을 부양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에는 납부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도 가지 못했고, 따라서 졸업장도 받지 못했을 만큼 곤궁한 처지였다.

무등산에 올라 혼자 마음을 달래곤 했던 그는 한때 흙벽돌 장사를 하며 대학 진학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1966년 22세의 나이에 지방행정서 기보(9급)직에 수석으로 합격한 그는 전남 광산군 서창면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디게 됐다.

공무원 김완기. 그는 꼼꼼한 일처리와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했다. 그의 모교인 광주고는 1951년 개교 이래 60여 명의 문인을 배출했을 만큼 전국적인 ‘문인학교’였다. 이성부(9회)·조병기(9회)·민용태(10회)·장효문(10회) 등의 시인과 문순태(9회)·양원옥(21회)·백성우(27회) 등의 소설가를 비롯해 평론에 김중배(2회)·김우창(3회)·이승룡(6회), 수필에 박연구(3회)·마삼렬(5회)·이이화(7회)·박석무(11회) 등이 문단에 큰 족적을 남겼다. 모교 교장을 역임한 수필가 오덕렬(13회)이 그의 동기다. 이런 학교 환경에서 김완기의 글솜씨는 더욱 단련됐다.

1971년 전남도청 문화공보실에서 근무할 때부터 김완기는 도지사 연설문 담당이었다. 1995년 민선 1기 단체장이었던 송언종 전 광주광역시장은 시장 담화문과 축사, 국정감사 답변 자료 등을 반드시 당시 김완기 기획관리실장의 ‘사전결재’를 받도록 했을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청와대 인사수석 시절, 기자실 인사브리핑 자료를 손수 챙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나는 ‘보좌관이나 담당 행정관들 꽤나 고생시키겠다.’라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일벌레’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특유의 성실함과 탁월한 업무추진능력을 인정받은 김완기는 고졸 출신이었지만 8년 만에 중앙부처인 내무부로 발령을 받았다. 이후 전남 구례·나주 군수를 거쳐 1994년 9급·고졸 출신으로는 감히 접근조차 힘들다는, 전국 시장·군수의 인사를 총괄하는 ‘내무부의 꽃’ 행정과장 자리에 올랐다. ‘쉬지 않으면 이뤄지리’라는 좌우명을 가진 그는 장·차관 자리의 길목인 행정자치부 공보관을 거쳐 직업 관료로는 최고의 자리인 1급 관리관으로 승승장구했다.

이 과정에서 출입기자들은 크나큰 지원군이 돼 주었다. 그는 9급 때부터 공보업무를 했고 전남도청을 거쳐 행정자치부에서도 공보관을 했을 정도로 공보와 깊은 연을 맺어왔다.

“김완기 수석은 제가 행정자치부 출입기자를 할 때 만났습니다. 기자들로부터 존경받는 공무원이었습니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송두영 전민주통합당 경기덕양(을) 지역위원장의 전언이다.

김완기는 2001년 말 광주시 행정부시장(1급)을 명예퇴직한 후 행정자치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지방자치단체국제화재단 상임이사로 나가면서 한동안 잊힌 인물이 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참여정부 출범 직후 광주·전남의 신망 받는 인사 발탁 케이스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차관급인 소청심사위원장으로 컴백을 했다. 소청심사위원장 시절에는 원만한 대인관계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또,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조정 역할을 잘해낸 균형 감각은 인사수석 발탁 때 높은 평점을 받은 요인이었다. 그의 한 지인은 ‘늘 웃으면서 들으라’는 뜻으로 소청(笑聽)이라는 아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김완기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직자로 출세하려면 야간대학이라도 다니라는 권유를 퍽이나 받았다. 하지만 “내 능력으로 하면 되지, 형식적인 간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학력 때문에 불편한 적은 있었지만 특수대학원 수료 등으로 적당히 장식할 생각은 없다.”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실력’ 하나만으로 진정한 ‘고졸 신화’를 몸소 체험해 보인 실천가였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김완기에게도 금품(?) 관련 비위가 딱 한 건이 있다. 광주고 2년 선배이자 지금도 절친하게 지내는 박석무 전 의원이 1992년 14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일이다. 당시 내무부 기획예산담당관으로 근무 중이던 김완기는 박석무의 빤한 형편을 모른 체할 수가 없어서 친한 지인들에게 100만 원씩 거둔 400만 원을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받아 박 전 의원에게 전달했다가 이듬해 감사원 감사에서 그만 적발되고 말았다. 다행히 부정한 돈이 아님은 입증됐다. 이해구 내무부장관조차도 “가까운 선배 좀 도와준 것을 가지고 징계는 무슨 얼어 죽을 징계냐” 하면서 “그냥 넘어가라” 하고 지시했다.

그러자 감사원은 사실이 그렇다면 정치자금법 위반이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야당 의원이었기에 더욱 문제가 된 것이었다. 결국 타협안(?)으로 직무와는 관련이 없는 돈, 즉 민간인으로부터 과(課) 운영경비로 받은 것으로 처리했다. 덕분에 청렴 의무 위반이 아니라 품위 손상 혐의로 비교적 낮은 징계인 ‘견책’을 받았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며 3년여를 차관급 정무직으로 일한 김완기는 2006년 5월 박남춘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인사수석직을 인계하고 물러났다. 같은 해 8월부터는 관례에 따라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2008년 5월까지 근무했다. 2013년 8월에는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가 상경 대학생들을 위해 공동 설립해 운영하는 재단법인 남도학숙 원장으로 깜짝 변신해 고향과 국가 사회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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