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Feb 07. 2017

06. 클레오파트라, 강하고 아름답고 현명해질 시간

<스무 살 클레오파트라처럼>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가족 살해 문화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클레오파트라의 엄마가 살해당하도록 버려뒀다. 아니, 그가 암묵적으로 허락하지 않았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엄마는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아내 살인범이었다. 그는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도 모두 죽였다. 물론 두 딸이 그의 권력을 위태롭게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폐나 추방 정도로 끝낼 수도 있는데 굳이 처형했다. 한마디로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무능력의 표본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정치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가장 열정을 쏟았던 것은 ‘피리’였다. 그는 궁녀들로 가득 찬 파티장에서 피리를 부는 것을 가장 좋아했고 또 가장 열심히 했다. 당연히 나라는 파탄이 났다. 전국 각지에서 반란과 폭동이 일어났고, 경제는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피리에 열중했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12세라고 속셈이 없진 않았다. 그는 최강대국 로마의 보호를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마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그런데 액수가 문제였다. 한 번 뇌물을 바치면 이집트의 1년 수입에 맞먹는 금액을 바쳤다. 안 그래도 어려운 나라 경제가 파산에 이르렀고 이는 대규모의 반란을 촉발했다. 결국, 그는 왕궁을 버리고 로마로 도망쳐야 했다.
     
빈털터리로 로마에 간 그는 로마 재벌 라비리우스 포스트무스를 찾아가 후일 다시 이집트의 왕관을 되찾게 되면 그에게 이집트의 모든 경제권을 이양한다는 서약을 하고 거액의 돈을 빌렸다. 그 돈을 원로원 의원들에게 마구 뿌렸다. 뇌물 공세에 넘어간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의 군대가 그를 위해 이집트로 진군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다시 이집트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신이 로마에 도망친 동안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 맏딸 베레니케 4세를 체포, 잔인하게 처형했다.
     
이후 이집트의 모든 실권은 로마에 넘어갔고, 그는 진정한 허수아비 파라오가 되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이집트 재정장관으로 임명한 라비리우스 포스트무스의 수탈이 극심했는데, 얼마나 심하게 쥐어짰던지 국민이 봉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봉기는 라비리우스 포스트무스가 로마로 도주하면서 끝났다.
     
한마디로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엄마 살해라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고, 이미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국가를 물려주었다. 뭐랄까,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영혼과 삶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클레오파트라의 위대한 점은 사악하고 무능력한 아버지의 존재를, 자신을 망가뜨리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지 않은가. 만일 내가 괜찮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을 텐데 같은 자기합리화 말이다. 사실은 자신이 삶을 바꾸려는 노력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게 초라한 삶을 사는 가장 실질적인 원인인데도 말이다. 여자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감정과 태도는 보통 이렇게 진행된다고 한다.
     
•어린 시절: 무한한 신뢰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따르기
•사춘기: 신뢰와 불신, 존경과 무시,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기
•이십 대: 실망과 분노, 무시와 체념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형식적으로나마 좋은 부녀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결혼 이후: 잊고 지내다가 어쩌다 한 번씩 애잔한 마음으로 걱정하고 그리워하기
   
물론 사춘기 이후에도 무의식 깊은 곳에는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본능처럼 자리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모든 것이 물질적인 잣대에 의해서 평가받는 ‘사회’에서는 그 아름다운 본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특히 우리나라같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면 내 능력보다 아버지의 능력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사회에서 잘나가지 못하는 이유, 내가 돈이 없는 이유,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심지어는 내가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까지도 ‘무능력한 우리 아빠 때문이다!’라고 단정 지으면 잠시 마음이 편해질지는 모르지만 결국 다음과 같은 잔인한 결론과 만나게 된다.
     
첫째, 아무리 아버지를 원망해도 아버지는 바뀌지 않는다.
둘째, 아버지가 바뀌지 않으므로 내가 사회에서 잘나가지 못하는 현실, 내가 가난하고 불행한 현실, 내가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현실도 바뀌지 않는다.
셋째, 앞으로도 계속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지금부터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면 된다. 내가 사회에서 잘나가지 못하는 이유, 내가 가난한 이유, 내가 불행한 이유, 내가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아버지가 아닌 나 자신에게서 찾으면 된다. 그러면 바뀌어야 할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결론과 만나게 된다.
     
비록 씁쓸하기 짝이 없겠지만, 언제까지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 수는 없으니 유치한 감정 대신 이성의 눈으로 그 순간을 바라보라. 그럼 깨닫게 된다. ‘바뀔 사람은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제부터 아빠에게 책임을 돌리는 삶이 아닌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살겠다!”라고 선언하는 그때가 당신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임을.

매거진의 이전글 05. 머릿속 생각을 시각화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