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Feb 08. 2017

04. 제발 일한 돈이라도 주세요.

<정의는 약자의 손을 잡아줄까>

‘이런 계약서도 있을까?’ 해외 건설 현장에 참여한 협력업체 대표들이 가지고 온 계약서를 보고 한참을 갸우뚱했습니다. ‘하도급사는 계약 서류에 명기되지 않은 사항이 있더라도 공사를 이행해야 한다. 추가 공사를 할 때 서면을 발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원사업자가 말로 지시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이에 응해야 한다. 공사 완료 3개월 이내에 하도급 공사 금액에 대한 합의를 못 하면, 최종 하도급 공사비는 원사업자가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금액을 제시하고 하도급업체는 이를 받아들인다.’

   
공사를 시작하고, 진행하고, 끝내고, 돈을 받는 모든 과정이 원청사인 대기업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계약서대로라면 원사업자가 터무니없는 액수의 공사 대금을 주거나, 아예 대금을 안 줘도 하청업체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런 계약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계약을 왜 하는지 협력업체 대표에게 물었습니다. 협력업체 대표는 말했습니다. “당장 직원들과 장비를 놀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리고 다음 공사를 수주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해외 건설 현장에서는 불공정 계약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공사 대금도 기간도 계약 해지도 원사업자 마음대로 

2015년 5월 10일 건설 협력업체의 어려움을 보도한 뒤 여러 협력업체 대표들이 ‘나도 정말 억울하다’며 제보를 해왔습니다. 이 가운데 몇몇 대표는, 해외에서는 사정이 더하다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국내 건설 현장이야 국내 하도급법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라도 할 수 있지만, 해외 건설 현장의 경우 이런 조치도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정을 얘기해달라고 전화를 하거나 인터뷰 요청을 하면 열에 아홉은 거절했습니다. 답답하고 분하지만 인터뷰해서 잘못 찍히면 앞으로 자신들의 업계에서 일하는 것은 끝나는 것인데, 어떻게 언론사에 사정을 말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그렇게 여러 업체를 취재하다가 국내의 한 대기업 건설회사와 계약을 맺고 공사를 진행했다가 부도 직전에 처했다는 한 업체를 만났습니다. 그 업체는 여러 대기업과 일하며 서러움도 많이 겪었지만, 그럭저럭 매출 규모를 유지하며 현상 유지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두바이에서 한 건설회사가 발주한 도로 건설 사업에 참여했다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부분의 공사 현장이 그렇듯 이번에도 선행 공정이 늦어졌습니다. 후행 공정을 맡은 이 협력업체는 공기를 맞추기 위해 장비와 인력 투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가 공사가 진행됐지만, 구두로 지시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추가 공사비용이 제때 지급되지 않자 자금 사정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공기를 맞추라는 원사업자의 압박은 심해지고, 돈은 없고. 현지인부들에게 임금 체납을 하는 횟수도 많아지자 더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해당 협력업체는 건설회사에 돈이 당장 급하니 영수증을 제출하면 영수증에 적힌 금액만이라도 결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건설회사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영수증을 제출하면 명세를 믿을 수 없다며 인건비만 지급하고 나머지 금액을 지급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사가 90% 마무리된 상태에서 계약 해지 통보를 했습니다. 협력업체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업체 인부들이 원사업자에게 와서 항의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이 계약해지의 이유였습니다. 
     
건설회사는 협력업체가 자신들에 손해를 끼쳤다며 장비도 모두 압류했습니다. 그리고 공사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 공제조합에 맡겨둔 10억여 원의 계약이행 보증금도 회수해 갔습니다. 빈손으로 한국에 들어온 협력업체는 분통이 터졌지만, 일단 정산부터 하기 위해 원사업자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협의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해당 협력업체는 공정거래위원회로, 변호사 사무실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언론사의 문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원사업자는 완고했습니다.
    
 
해외 건설 현장은 국내법 사각지대

해외에서 건설 사업을 진행할 경우 대부분 업체가 해외 현지법인을 설립해서 계약합니다. 원소유주는 한국 기업이더라도 현지에 유령회사를 설립해서 계약해야 사업 진행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국내법의 감시를 벗어난 상태에서 계약을 진행하다 보니, 원사업자가 계약 조항을 일방적으로 자신들에 유리하게 제시하기 시작한 겁니다.
     
해외 건설 현장에서 체결된 계약서를 보면 계약 수정도, 대금 지급도, 작업 종료 시기도 모두 원사업자가 결정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사가 지연될 때는 어떤 비용도 원사업자에게 부과하지 말고, 협력업체 스스로 적절한 조처를 하라고 되어 있는 계약서도 있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한 협력업체 관계자는 자신이 해외 현장에서 작성한 계약서를 두고 ‘노예 계약서’라고 지칭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와 국토교통부가 해외 건설업 표준 하도급 계약서를 만들었습니다. 국내 하도급법에 근거해서 해외 건설 현장에서도 합리적으로 계약할 수 있도록 일종의 지침을 제시한 겁니다. 하지만 이 계약서는 권고사항일 뿐 강제 사항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법적인 제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안 지켜도 그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해외 건설 현장에서 공사 대금을 못 받았다며 협력업체들이 눈물을 흘리는 일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06. AI·로봇, 더 생각해 볼 만한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