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장인정신을 말하다.
<공터에서>, 작가 김훈의 신작
김훈 작가의 신작 <공터에서>가 지난 2월 3일 출간되었습니다. <공터에서> 출간 전후로 출판사 이벤트와 출간 전 연재, 언론 인터뷰까지 이어지며 작가의 신작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한껏 부풀었습니다. 출간도 되기 전에 예약 주문하는 독자에게는 김훈 작가의 친필 사인 본이 전달되는데, SNS에서는 친필 사인 인증이 성지순례처럼 이어졌습니다.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살아낸 아버지와 그 아들들의 비애로운 삶이라는 카피로 책은 세상에 호소합니다. 막막한 세상과 적막한 세상이라는 표현은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 이어지는 작가적 표현이어서, <공터에서>를 소개하는 이곳저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책은 김훈의 문장과 표현으로 존재를 드러내는데, 실상 김훈 작가의 신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쟁점이 됩니다. 김훈 작가의 신작이기에 기다려지고, 작가 김훈의 작품이기에 믿고 봅니다.
<공터에서>는 그렇게 화제의 신간이 되어 출간 전부터 줄거리가 오픈되고, 출간 전 연재를 통해 작품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책을 검색하면 책에 관한 내용과 의도를 파악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공터에서>를 서평 하려고 하는데, 무엇을 서평 해야 하는가. 막막함을 느낀 이유였지요.
그런데도 이 책을 서평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며칠 전 진행된 출간 인터뷰 때문입니다. 그의 책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글쓰기 하는가. 떠오르는 질문의 답이 인터뷰에 숨어 있었습니다. 김훈 작가의 책은 책으로만 이해할 게 아니라 작가의 장인정신을 함께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김훈의 글쓰기와 장인정신에 대하여
1. ‘꽃이’와 ‘꽃은’은 어찌하여 다른가?
“그렇게 기법을 중시할 때 ‘조사’는 아주 중요하다.” 김훈은 이전의 강연에서도 조사의 중요성을 언급해 왔습니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이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인데요, 김훈은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를 구별해 냅니다. 처음에는 ‘꽃은 피었다’라고 썼다가 이틀간 고민 끝에 ‘꽃이’로 바꿨다고 합니다.
이번 인터뷰에서 김훈은 “학문 자료는 별 재미 없고, 기자들이 현장에서 쓴 글을 좋아한다. (...) 실록처럼 사실에 바탕을 둔 글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김훈은 늘 ‘객관과 사실의 세계’를 동경해 왔죠.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는 객관성과 주관성의 차이라고 합니다. ‘꽃이’는 객관적 사실이며, ‘꽃은’은 관찰자의 주관과 정서가 개입됐다는 것입니다. 조사 한 글자가 바뀌며 객관이 주관이 되는데, 김훈이라는 언어의 장인은 글자 하나를 두고 객관과 주관을 구별해 내고 바꿔 냅니다.
“문체에 관한 한 나는 매우 신중하다. 어떤 글들을 쓰려고 할 때 그 목적에 맞는 장인적 기법을 찾는 일은 내게 무척 중요하다. 그게 없는 한 나는 그 목표를 향해 갈 수 없다. 그렇게 기법을 중시할 때 ‘조사’는 아주 중요하다.
한국어 논리 작업에서 조사가 없으면 안 된다. 한국어로 하는 사유는 조사를 연결한다는 것이다. 우리 조사는 ‘은, 는, 이, 가’ 등 대여섯 가지다. 그걸 뗐다 붙였다 하면서 가난한 언어의 삶을 사는 거다. 조사는 모호한데 그 모호함 속에 모국어의 힘이 있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와 ‘비는 내린다’는 다른 느낌이지만 그 차이를 문법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다르다. 그런 걸 문장마다 하나하나 따지려면 진이 빠진다. 하지만 그런 노력 없이는 문체를 만들 수 없다.” _ <공터에서> 출간 인터뷰 중에서
조사 하나를 문장마다 따지려면 진이 빠지는데, 그런 노력 없이는 문체를 만들 수 없다는 단호함에서 김훈의 언어에 대한 장인 혼(魂)이 느껴집니다.
2. 작가로서 자기 글의 한계가 무엇인지 아는가. 김훈이 말하는 자신의 ‘한계’
“내가 할 수 있는 글쓰기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나는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처럼 서사와 장면, 그리고 흐름을 글로 그려낼 수 있는가. 셰익스피어처럼 인간의 구만 리 마음속까지 들어가 심리를 묘사해낼 수 있는가. <마지막 잎새>의 오 헨리처럼 짤막한 글에 감정을 출렁이게 할 수 있는가. 톨스토이처럼 인간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가. 김훈이 말하는 이 시대의 큰 작가 조정래나 황석영 같은 한 시대의 억압적인 구조나 역사적인 틀, 그 전체를 보면서 주물러 가면서 인물을 배치하고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는가.” _ <공터에서> 출간 인터뷰 중에서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한계가 어떠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역 연기자가 ‘내 연기의 한계는 여기까지야’, 가수가 ‘내 노래의 한계는 이만큼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김훈의 말을 듣다가, 문득 한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스스로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계는 ‘범위’를 정해줍니다.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 말해주죠. 아이들에게 자전거는 자전거 도로에서만 타야 한다고 말해줄 때, 아이는 그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타고 놀 수 있는데, 경계를 넘으면 위험과 맞닥뜨려야 합니다. 소위 ‘넘는’ 행위가 경계 밖에서 이루어지죠. 그래서 한계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소설 안에 전망이나 희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아마 내가 쓴 다른 모든 작품에서도 발생하는 문제일 텐데 많은 사람이 그것이 너의 한계라고 하는 것 들었다. 그것은 나의 한계다.” _ <공터에서> 출간 인터뷰 중에서
<공터에서>는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사건들을 마씨(馬氏)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 마동수와 그의 삶을 바라보며 성장한 아들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제강점기, 삶의 터전을 떠나 만주 일대를 떠돌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겪어낸 파란의 세월,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시간과 연이어 겪게 되는 한국전쟁, 군부독재 시절의 폭압적인 분위기,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한국인들의 비극적인 운명,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죽음, 세상을 떠도는 어지러운 말들을 막겠다는 언론통폐합, 이후 급속한 근대화와 함께 찾아온 자본의 물결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사건들을 마씨 집안의 가족사에 담아내지요.
‘한계’라는 표현에 담긴 범위 안에서, 김훈은 작가의 관점을 펼쳐냅니다. 마동수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독특한 사건의 전개 방식도 그가 정한 작품의 범위 안에서 결정된 거죠. 그래서 다른 관점에서 보면, 김훈의 ‘한계’는 사전적 의미에서의 한계가 아니라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자 작품이라는 그릇에 담아내는 요리의 질감이 아닐까요.
3. 김훈의 글쓰기 전략 : 섬세함으로 전체를 드러낸다.
김훈 작가의 글쓰기 전략은,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최선을 이루어낼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그래서 김훈 작가는 섬세한 사건의 기록에 몰입하는 전략을 세웁니다. 전략의 개념을 전쟁이나 경영에서의 정의와는 조금 다르게, 내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는 방책이라 한다면, 김훈의 ‘글쓰기 전략’은 곱씹어보면 곱씹어볼수록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나는 어떤 일생 전체를 전체로서 묘사할 수 없다. 고심참담해서 도입한 기법이, 전체를 통괄할 수 없는 자로서는, 디테일에 갑자기 달려들어 날카롭게 찍어 버리는 스냅적인 기법을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디테일을 통해 큰 것을 드러내 돌파하려는 생각이다. 그런 디테일을 그리되 펜의 스피드를 매우 빠르게 해 그 골격만을 그려내고 세부 사항을 그려내지 말자, 크로키 같은 기법을 써야겠구나, 생각했다. 전체를 말할 수 없는 자의 전략적 기법으로 말이다. 스냅과 크로키 데생법을 내 글쓰기 전략으로 세웠다.” _ <공터에서> 출간 인터뷰 중에서
김훈 작가의 장인정신, 한계, 섬세함이 담긴 <공터에서>
김훈 작가의 장인정신과 한계, 그리고 섬세함에 대한 그의 철학이 <공터에서>의 60년을 만들어냅니다. 오래전부터 그는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습니다. 1910년 국권침탈로 조국이 없어지던 해에 태어난 아버지와 1948년 정부 수립하던 해 태어난 김훈 자신에 대해, 부자의 생애에 찍혀 있는 운명적인 좌표에 대해 다섯 권 정도 분량의 글을 쓰고자 했습니다.
그 전체를 다 그려내지 못했기에 김훈 작가는 <공터에서>는 더 섬세한 사건의 기록과 희망 없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언어에 대한 장인정신은 문장 하나하나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신작을 기다리게 만든 이유 아닐까요.
임재영 l 더좋은책연구소 소장, 서평가
“독서는 완전한(full) 사람을, 토론은 준비된(ready) 사람을, 쓰기는 정밀한(exact) 사람을 만든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에 이끌려 독서에 몰입했다. 책을 읽고 비평하며 더 좋은 책을 소개하는 일에 매력을 느껴 서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