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1943년 유학길에서 무작정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자퇴를 한 그때처럼, 다짜고짜 카메라를 사달라고 한 그때처럼 왜 그러느냐고, 앞으로의 계획은 있냐고, 아버지는 묻지 않았다. 일본에서 프로화가로 데뷔하고 9년이나 도쿄 생활을 하다 돌아온 아들에게 그림을 보여 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아버지에게서 돌아온 말은,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였다. 그리곤 한결같은 신뢰와 사랑으로 묵묵히 아들을 지켜보았다.
이런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유영국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전쟁 중이라 더욱 극심한 식민통치에 시달려야 했으며, 무엇보다 유영국이 추구하는 화풍은 한국 화단에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유영국이 돌아오자 하루가 멀다 하고 일본 경찰이 집을 맴돌며 감시하는 바람에 당장의 운신조차 편치 못한 상태였다. 유영국과 같은 서구 모더니즘 예술가이자 자유로운 사상을 추구하는 지성인은 일본 경찰의 요주의 감시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정국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이 어두웠다.
1940년 2월, 일본은 강제로 창씨개명을 실시하더니 다음 해에는 한국어 수업마저 폐지시켰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동남아시아 일대를 무서운 기세로 침략해가기 시작했다.
국어 말살을 꾀하던 일제는 1931년에 창설하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며 한글 운동을 펴나가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비밀투쟁단체라 하여 1942년 10월 주시경 등을 비롯한 30여 명의 지성인을 잡아다 심한 옥고를 치르게 했다.
1943년에는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인정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런 선언에도 아랑곳없이 1944년 남자들에게는 징집 명령이, 여자아이들을 상대로는 전국적으로 정신대를 모집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도쿄 문화학원 설립자 니시무라 교장이 ‘천황불경죄’로 옥살이를 하고 학교가 강제 폐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유영국의 심정은 더욱 참담했다.
그러자 형이 그에게 가업으로 하던 어업을 권했다. 어차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가만히 놀고 있을 유영국도 아니었다.
유영국은 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음을 정하자 곧바로 바다로 나갔다. 그때부터 유영국은 어부들과 함께 고기를 잡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유영국은 실로 9년이나 동경에서 유학했던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예술가였지만 그런 명예나 허명에 연연치 않았다. 그에겐 명예 따위에 매달리는 것이란 유치한 감상에 불과했다. 자신의 꿈을 간절히 이루길 바라는 만큼,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현실도 소중히 일궈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였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좋아했고 끝없이 너른 바닷길을 따라 선진문물을 경험하고 신세계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 그였기에 바다는 제2의 세상이자 제2의 화폭이 되어 주었다.
죽변항은 울진에서 조금 북쪽에 있었다. 해발 1,000여 미터의 응봉산과 동해바다를 접하고 있는 죽변은 옛날부터 강원도 일대에서 가장 붐볐던 항구였다. 유영국의 집안은 이곳에 큰 배를 가지고 있었다. 유영국은 그 배로 어업을 시작했다. 선박을 관장하는 선주로, 또 허드렛일을 하는 뱃사람으로, 사시사철 고기잡이를 일선에서 지휘했다.
바다풀 1959, 캔버스에 유채, 130.2×96.1cm : 1959년 제3회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된 <바다풀>. 심연의 바다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바다풀을 소재로 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도 노 란 빛을 받아 반짝이는 생명의 힘과 신비가 작품의 주제다. 자연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도, 그 대상이 지닌 ‘에너지’를 더욱 깊이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조형 방법을 탐구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어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영국의 배는 죽변항에서 가장 높은 어획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유영국의 승부욕은 고기를 잡을 때에도 빛을 발했다. 꼭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의 천성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수협이 각 선박의 어획량을 항구에서 관리했다. 유영국은 자신의 배가 1등을 하지 못한 날이면 은근히 속상해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배가 왜 고기를 많이 잡지 못했는가에 대해 분석해보고 더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곤 고기가 나는 곳이라면 저 북쪽 함경도를 비롯해 남해와 서해 먼바다까지 거침없이 배를 몰고 나갔다. 배 안에서 선원들과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술을 마시며 최고의 어획량을 기록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독려했다.
그렇게 노력하여 자신의 배가 최고의 어획량을 기록하면 선원들에게 막걸리와 안주를 크게 베풀며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유영국은 선원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선원들도 진심으로 마음을 써주는 유영국을 존경하며 따랐다.
그러나 어부들과 매일 독한 소주를 마시면서도, 손아귀에 고름이 돋도록 고기를 잡아 올리는 혹독한 노동 속에서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온통 선이요, 면이요, 색채였다. 그랬다. 유영국은 하루도 그림을 잊고 산 적이 없었다. 어차피 말할 사람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도 없었기에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직접 캔버스에 그리진 못해도, 사시사철 출렁이는 동해바다의 서슬 푸른 파도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대자연의 무상함을 마음속 화폭에 무한히 담고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을 때면 멀리서 아스라이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육지에서는 밤마다 무채색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 너른 허공의 캔버스에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유영국은 잊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바치겠노라 다짐하고 시작한 그림…, 도쿄 문화학원에서 느꼈던 자유와 환희, 거기서 만났던 영혼의 지우들…. 혼신을 다했던 예술에의 도전, 그리고 마침내 입성한 화단…. 청춘의 추억이 아로새겨진 그곳….
원(円)-A 1968, 캔버스에 유채, 136×136cm : 1968년 유영국은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의 《한국현대회화전》, 신세계화랑에서의 《개인 전》 등을 거치면서, 절정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쏟아냈는데, 이 작품 <원(円)-A>는 이 두 전시에 모 두 출품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원’이 마주하는 기하학적 형태와 노랑, 빨강 등 원색의 변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단순한 형태와 색채만으로 일출의 장관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유영국 회화의 특징이다. 즉 그의 작품은 분명 ‘추상’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나, 자연의 ‘숭엄’을 품어내고 있는 것이다. 점차 마티 에르의 물질성은 배제되어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얇은 물감층의 평면적인 패턴에 불과하지만, 멀 리서 바라보면 미묘한 붉은 색면의 구성이 삼차원적인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도쿄로 돌아가 그곳에서 화가의 입지를 세우리라 생각했다. 그때를 기다리는 동안 예술을 계속할 자본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그가 바다로 간 진짜 이유였다.
죽변항에서 지낸 그 시절, 유영국은 고독했으나 그의 고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영국은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귀국하여 고향에서 뱃일을 하는 동안 식구들에게 한 번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그림에 문외한인 아버지와 식구들이 자신의 추상그림을 보고 실망할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고. 그 많은 돈을 들여서 한 그림 공부라는 게 어찌 그리 이상스런 모양인지 이해하지 못할 식구들의 모습이 너무도 뻔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그냥 바다로 일하러 나갔다고.
그랬다.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시던 아버지도 형제들도 결코 알 수 없었다. 미술가로서 유영국이 가진 그 절체절명의 고독만큼은….
이 시절 유영국을 더욱 힘들게 했던 건 당시 한국 화단에 대해서 전혀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충 짐작은 갔지만 도쿄에서 귀국하여 곧바로 고향으로 온 터라, 서울에서는 어떤 그림들이 그려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었다. 자신의 실험기를 미처 못 마치고 나온 그로서는 자신이 가야 할 예술적 방향에 대한 고뇌와 더불어 정보가 완전히 차단된 죽변의 생활이 참으로 답답하고 아득할 뿐이었다.
그러나 벽에 부딪혔을 때 강한 자는 길을 찾고, 약한 자는 주저앉을 터…. 더 이상 내디딜 곳 없는 아득한 절벽 앞에 섰을 때 어떤 사람은 초인적인 길을 열기도 한다.
유영국은 추락과 비상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고뇌했다. 이 시기에 가졌던 답답한 심정과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 과정을 유영국은 나중에 이렇게 토로했다.
일본에서 한국에 돌아와 보니, 현대미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얼마 안 있어 해방은 되었지만 그림 그릴 엄두가 안 나고, 그리려고 해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 길이 없었어요. 그때 답답해서 혼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온 추상이라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가를 내 나름대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이때 유영국은 추상의 본질에 대해 가혹하게 자문하기 시작했다.
추상의 진정한 의미와 개념이 무엇인지 깊이 고뇌하며 근원에서부터 본질을 찾아 나갔다. 그렇게 본질을 되묻는 동안 유영국만의 창조적 추상 개념과 원형이 새롭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어두운 밤바다에서 다시 출항을 위해 사상적 돛대를 재정비하듯. 그러면서 자신의 근원적인 고독도 스스로 평생 지고 가야 할 천형임을 인정하면서 유영국은 그 불모의 땅에서 자신의 앞날을 진지하게 열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