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1937년 화단에 데뷔한 이후부터 1940년까지 유영국은 도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N.B.G.전》(도쿄)에 1938년에 열린 제2회부터 참가했으며, 《자유미술가협회전》(도쿄)도 1938년 5월에 열린 제2회부터 참가했다. 1940년에는 김환기, 길진섭, 이규상, 이중섭, 안기풍 등과 더불어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도쿄), 제7회 《N.B.G.전》(도쿄), 《창작미술가협회(자유미술가협회의 개칭)전》(경성부민회관 소강당, 서울) 등에 참가하며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제3회~6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던 유영국 작품의 이미지가 실 린 엽서들이다. 원작은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유화작품 <10-7>이 남아 있 고, 1979년 및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재제작된 부조작품이 전해진다. 자유미술가협회는 1940년 명칭을 미술창작가협회로 개칭해야 했으므로 5회전부터는 《미술창작가협회전》으로 불린다.
그러나 세상에는 한 인간의 꿈과 의지만으론 어찌할 수 없는 현실도 있다. 최선을 다했으나 시절이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고향 집에서 오던 송금이 모두 끊겨버렸다. 생계마저 깜깜한 상태에서 사진기술로 직업을 알아보려 했지만, 전쟁 중이라 그런 일거리는 찾을 길조차 없었다.
생계도 생계였지만 무엇보다 유영국을 힘들게 한 것은 일본 화단에 당당히 데뷔하고도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벌이던 일본은 점점 더 극단적인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 전위적인 예술 활동은 모두 금지되었다. ‘자유’나 ‘전위’, ‘독립’이란 단어조차 함부로 쓸 수 없었고, ‘자유미술가협회’도 ‘미술창작협회’로 개명해야 했다.
1940년 초반이 되자 일제는 대놓고 예술가들에게 국가주의, 군국주의를 선양하는 주제의 작품만 내라고 압박했다. 침략을 미화하는 전쟁 기록화 따위나 그릴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당시 많은 일본 화가들이 그 지시에 따랐다.
1941. 4. 10-21, 제5회전 자유미술가협회는 ‘자유’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1940년 6월부터 협회명을 미술창작가협회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사이토 요시시게 같은 일부 지각 있는 화가는 군국주의에 동조할 수 없다며 붓을 꺾고 행상을 하기도 했고, 하세가와 사부로 같은 이는 아예 절필하고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다도를 익히며 지냈다. 그러나 그런 일본 화가는 극소수였다.
이때 유영국의 일본인 선배나 동창 중에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날 문화학원 동창이 유영국을 찾아왔다. 유영국도 잘 아는 같은 문화학원의 선배와 결혼한 여자 동창이었다. 깡마른 그녀의 손에는 값이 꽤 나갈 듯한 기모노 한 벌이 들려 있었다. 전쟁 중에 남편이 끌려가서 생계가 어려웠던 그녀는 유영국에게 기모노를 전당포에 대신 좀 맡기고 돈을 빌려달라 부탁했다. 그러자 유영국은 아무 말없이 자신의 양복을 대신 맡기고 빌려온 돈을 기모노와 함께 그녀에게 주었다. 돈과 함께 기모노를 도로 받은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당시 화가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붓을 놓든가, 침략전쟁을 고무하는 그림을 그리든가. 일본인 화가들에게 이러한 선택은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인 유영국으로선 결코 그런 만행에 동참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어수선한 상황에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한국 화가들은 속속 귀국을 택했다. 유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유영국은 1941년 제5회 《미술창작가협회전》(도쿄)과 제8회 《N.B.G.전》(도쿄)을 끝으로 그림은 더 이상 출품하지 않았다. 대신 창립전부터 줄곧 참여했던 1942년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전》(도쿄)에 그림 대신 경주에서 찍어온 불교 사찰과 탑, 불상 등을 모티브로 한 사진작품을 출품하곤 이를 끝으로 1943년 귀국길에 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유영국은 참담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한순간에 붓을 놓게 될 줄은 차마 몰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작가로서의 실험기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유영국의 심정은 안타까움이 더했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가슴 시리게 줄담배만 피우며 현해탄을 바라보던 유영국의 눈동자엔 만장같이 붉은 노을이 젖어 있었다.
훗날 유영국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만약 전쟁이 끝나지 않고 일본이 승리하여 군국주의가 더욱 팽창되었더라면 나는 영영 작가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귀국하여 잠시 붓을 놓고 어부가 되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처럼 정말 영영 예술을 다신 할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