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1950년 6월 25일 모두가 잠들어 있던 일요일 새벽 4시, 어둠 속에서 ‘탕탕탕!’ 총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자다 말고 밖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은 그 굉음이 끔찍한 전쟁의 서막이라는 것을 차마 알지 못했다. 38선 근처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전부터 크고 작은 충돌이 있어왔기에 그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날 새벽 북한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 군단으로 38선을 넘어 곧바로 침공해 들어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미처 어디로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사이, 거짓말처럼 단 3일 만에 함락된 서울 시민들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유영국도 꿈인가 싶었다. 무엇보다 아내가 만삭이었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배부른 아내를 끌고 무조건 길을 나설 수도 없었다.
서울이 함락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김환기가 헐레벌떡 집으로 찾아왔다. 유영국과 마찬가지로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김환기는 어서 빨리 ‘미술동맹’에 나가 인민군에게 협조하자고 했다. 그 방법만이 다 같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김환기는 판단했던 것이다.
미술동맹에 가보니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미술부 총책임자는 놀랍게도 문학수였다. 문학수는 유영국과 같은 일본 문화학원 출신으로, 유영국이 최고상을 탔던 《자유미술가협회전》에 김환기, 이중섭과 함께 출품하면서 회우로도 친하게 지내던 평양 출신의 화가였다. 그러나 문학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문학수는 친구들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이때 유영국은 공산주의로 무장된 감정 없는 얼굴의 문학수를 보면서 이데올로기의 무서움을 새삼 절감했다.
어찌 됐건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화가들은 문학수 휘하에 속속 동원되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인민군들이 시키는 대로 김일성이나 스탈린의 초상화 또는 핏빛같이 붉은 바탕에 총칼을 높이 들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는 군무 등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유영국은 인민군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인민 종군화가로 나가라고 했다. 이들에게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음을 직감한 유영국은 일단 생각 좀 해보겠다고 말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곧바로 몸을 숨긴 채 힘든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도피도 도피지만, 집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굶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그즈음 장발과의 불화로 서울대에 사표를 내고 나온 터라 수입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하필 전쟁이 나기 직전에 아내가 시댁 조카 등록금에 쓴다는 말에 자신과 상의도 없이 2만 원쯤 되는 비상금을 다 줘버린 터였다. 당장 집 안에는 아이들 먹일 쌀 한 톨이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이토록 난감한 지경에 빠져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이런 참담한 현실을 모른 체하며 지하실에만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며칠 후 유영국은 밖으로 나가 가지고 있던 돈을 탈탈 털어 손수레를 한 대 샀다. 그리곤 숯을 만드는 곳에서 숯을 사서 싣고는 동대문시장까지 손수레를 끌고 가서 숯을 다 팔았다. 그 돈으로 쌀을 사고 아내에게 약간의 돈까지 쥐여주었다. 아내는 그 돈을 들고 다시 동대문시장에 나가 시어머니께 드릴 먹을거리와 생활용품을 마련했다.
유영국은 책임감이 투철한 남자였다. 또한 남의 이목 같은 것엔 신경 쓰지 않는 대인배였다. 날 때부터 부잣집 아들에, 엊그제까지만 해도 서울대학교 교수였지만, 죽변에서의 그때처럼 이번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얼굴에 숯검댕을 묻힌 숯장수가 되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도처에 깔린 상태에서 대낮에 계속 활보하며 다니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인민군들은 군인들의 수를 보충하기 위해 젊은 남자만 보면 무조건 다 끌고 갔다.
유영국은 생각 끝에 이번엔 집에 있던 옷감을 들고 인적이 드문 시골 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과 어머니가 주신 광목이며 모시, 베, 명주 등의 옷감을 들고 근처 시골로 가서 쌀이나 잡곡 등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낮에는 인민군에게 발각될까 봐 어두운 밤에만 다녔다. 그러나 길을 나서면 이틀이 더 걸릴 때도 많았으며, 옷감과 바꾼 곡식을 들고 걸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죽변에서 뱃일을 해보긴 했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곡식을 들고 그 먼 길을 걷는 일은 그로서도 쉽지 않은 노동이었다. 그렇게 밤을 새워 걷다 보면 두 다리가 덜덜 떨려오곤 했다. 그래도 식구들을 생각하며 깜깜한 밤길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유영국은 전쟁이 나자 서울 누이 집에 계시던 어머니를 모셔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영국이 아침밥 한 덩이를 먹고 옆집 지하실에 채 숨기도 전에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한 유영국은 그 자리에서 잡혔다. 그들은 색출된 다른 남자들과 함께 유영국을 중앙시장 옆 초등학교로 끌고 갔다. 어머니는 마당 장독대에 물을 떠놓고 밤새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들이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래서였을까. 유영국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인민위원회 사람들은 잡아온 젊은 남자들을 앉혀놓고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영국은 자신을 부르는 이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호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돌아가라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영국은 한걸음에 도망쳐 왔다.
유영국은 효자였다.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들 만큼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늘 어머니를 찾아뵈며 돌아가실 때까지 어려움이 없도록 극진하게 봉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