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유영국은 전쟁 중에도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젊은 장정이 밖으로 돌아다니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인민군들은 길거리는 물론 집집마다 숨어 있던 남자들까지 혈안이 되어 찾아다녔다. 남자란 남자는 이제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유영국은 자신의 바로 옆집인 마사회 회장 집 지하실에 땅을 파고 그 속에 숨었다. 지하실이 넓고 방이 많던 유영국의 집은 인민군에게 접수되어 식구들은 근처 다른 집에 옮겨 살아야 했다. 유영국의 집을 접수한 인민군들이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이 집은 그림 그리는 선생네 집이니까 물건을 함부로 다치게 하지 말라며 자기네들끼리 주의를 주곤했다. 그나마 고마웠다.
그렇게 숨어 지내던 어느 날, 자정이 넘은 시각에 인민군들이 아내가 자는 방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깜짝 놀라 일어난 아내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오늘 밤으로 자기들은 떠날 것이니 낮에 빌려온 전축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 밤으로 전축을 찾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정말 거리가 텅 비어 있었고, 인민군들은 코빼기도 뵈지 않았다. 국군이 다시 서울에 입성한 9・28수복 날 아침이었다.
유영국과 아내는 집으로 달려갔다. 인민군이 물러나자 이번엔 동네 사람들이 떼 지어 다니며 이 집 저 집에서 돈이 되는 거라면 마구 들고 가고 있었다. 무법천지가 따로 없었다. 유영국의 집에도 벌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와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집 지하실을 뒤지던 사람들이 이 집은 위험하다고 소리치며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깜짝 놀라 내려가 보니 보지 못했던 박스가 지하실에 가득 쌓여 있었다. 박스를 열어보니 모두 총탄이었다. 유영국도 가슴이 철렁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 총탄들은 나중에 경찰서에서 모두 수거해 갔다.
인민군은 물러갔지만 집에는 또다시 먹을 것이 없었다. 이번엔 팔 것도 없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아내가 장롱을 열어 유영국이 일본에서 입던 바바리코트를 꺼내 들고 동대문시장으로 나갔다. 그러나 아내는 눈물을 훔치며 그대로 돌아왔다. 코트가 다 낡고 좀이 슬어 쌀 한 되는커녕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마침 어머니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누이에게 부탁해서 쌀 두 말을 얻어왔다. 그러나 쌀 두 말은 온 식구가 버티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아내는 곧 출산을 앞둔 몸인데도 남편과 시어머니에게만 밥을 지어 올리고 자신은 거의 굶다시피 하거나 보리쌀 조금 넣은 양배추 죽으로 연명했다. 출산하던 날에는 기운이 다 빠져 힘을 쓸 수조차 없었다. 커피라도 마시고 기운을 내라며 유영국이 커피를 타러 간 사이에 아내는 아이를 낳았다. 밥 지을 쌀은 없어도 남편이 좋아하는 커피는 집에 있었던 것이다. 막 태어난 장남 진이도 너무 허기져서 그랬는지 잘 울지도 못했다.
서울은 다시 수복되었지만 민심은 흉흉하고 사람들 사이엔 알 수 없는 불신과 냉기가 가득했다. 지난번 서울이 인민군 손에 넘어갔을 때 미처 피난 가지 못했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인민군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엔 수복이 되어 서울로 돌아온 사람들이 이른바 그 당시 남았던 ‘잔류파’들이 인민군을 도왔다며 몽땅 공산당 취급을 하면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유영국도 매일 불려 다녀야 했다. 김환기를 따라 단 한 번 미술동맹에 얼굴을 내밀고는 숨어 지낸 게 다였는데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며 누명을 씌우는 것이었다. 같은 예술가들끼리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 불신과 냉혹함에 놀라웠다. 그때 미술동맹에 나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김일성이나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렸던 화가들은 크게 홍역을 치렀다. 같은 동료였던 화가들끼리 정치적 이념으로 편을 갈라 서로를 고발하고 단죄하는 짓들이 유영국으로선 환멸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울이 수복된 지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이번엔 다시 중공군들까지 합세해서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에 다시 서울을 탈환한 국군은 내처 북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야간진군과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국 인민지원군이 가세하자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12월 14일 시작된 장진호 전투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미1사단과 동부전선의 한국군 12만 명이 북쪽 피난민 10만 명과 합쳐 내려오고 있었다. 흥남철수였다. 1950년 12월 중반부터 이듬해 1월 초까지 1・4후퇴에 이어 서울은 또다시 인민군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지난번 침공 때 미처 움직이지 못했던 서울 주민 대부분이 1・4후퇴 때는 서둘러 피난을 떠났다. 이때 육로로 피난을 떠난 사람이 40만 명이 넘었다. 유영국도 더 이상 서울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연로하신 어머님과 막 출산한 산모와 어린 딸들을 데리고 어찌 떠나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그때 마침 고맙게도 유영국의 매제가 트럭을 한 대 준비해주었다. 차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난리통에 트럭을 탈 수 있다는 건 천우신조였다.
그런데 피난 떠나기 직전에 아내가 기사에게 부탁해서는 트럭을 끌고 어디엔가 다녀왔다. 나중에 보니 트럭 뒤 칸에 인쇄용 갱지 반차분이 실려 있었다. 아내는 전에 인쇄소 사장에게 꾸어 주고 못 받고 있던 돈 대신에 갱지를 얻어온 것이었다. 너무 굶어서 실신하듯 아들을 출산하고 변변하게 몸조리도 하지 못해서인지 아내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갱지 위에 앉아서 유영국의 가족은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갱지와 식구들과 짐 보따리만 해도 가득해서 집에 있던 그림은 한 점도 가져갈 수 없었다. 때마침 의사 부부가 집을 쓰겠다고 해서 유영국은 흔쾌히 승낙하고, 집안 살림은 뭐든 다 써도 좋으나 화실에 있는 그림들만은 건드리지 말고 잘 보관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피난길에 올랐다.
짐을 가득 실은 트럭 위에 아내는 막 낳은 첫아들을 포대기에 싸서 가슴에 품고 나머지 손으론 리지와 자야의 허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 북풍이 몰아치는 한겨울 날씨에 아이들도 얼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갓난 동생의 포대기를 둘러싸서 아내와 두 딸이 체온으로 지키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는 유영국의 가슴이 찡하게 아려왔다.
젊은 남자를 잡아가는 건 인민군만이 아니었다. 서울을 빠져나가기 위해 한강을 건너는데 이번엔 국군 헌병이 검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유영국을 보자 “젊은 사람은 내려오라”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아내는 남편을 막아서며 이 사람은 젊은 사람이 아니라 쉰 살이나 먹은 노인네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마침 그동안 못 먹어서 비쩍 마른 데다가 머리까지 허옇게 새어 있긴 했다. 헌병은 아무리 봐도 믿을 수 없다며 자꾸 내려오라 하자, 아내는 이번엔 자신은 후처라고 하며 제발 한 번만 봐달라며 애원했다. 아내가 하도 사정하자 그러면 신분증을 보자고 했고, 이분은 대학교수인데 미처 못 챙겨왔다며 또다시 울면서 사정했다. 애원하는 아내의 모습이 딱했는지 보다 못한 헌병들이 그냥 가라고 했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 절박하게 애원하는 아내를 보며 유영국의 가슴은 다시 먹먹하게 젖어왔다.
한국전쟁의 피난민은 120만 명이 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어 거리에서 떠돌다 죽어갔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온 가족을 데리고 무사히 고향집에 도착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유영국은 하늘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