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양조장을 시작하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by 더굿북
2.jpg?type=w1200 작품 1964, 캔버스에 유채, 130×194cm 제 1회 개인전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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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울진 유부자’로 명성이 자자하던 유영국 집안도 마침내 가세가 기울었다. 게다가 유영국은 도쿄에 있는 동안 자기 몫의 유산은 다 갖다 썼기 때문에 설혹 재산이 있다 해도 그가 받을 것은 없었다.

고향집에는 먼저 피난 온 누님들 가족까지 합쳐서 60여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모여 있었다. 유영국은 자기 식구들은 자신이 책임지기 위해 곧바로 방 한 칸을 얻어 살림을 났다. 그러나 세 아이와 함께 눕기에 방이 얼마나 작은지 키가 큰 유영국은 똑바로 누울 수조차 없어서 사선으로 자야 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는 돈이었다. 돈을 벌어야 가족이 굶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진 밑천이 없었다. 도쿄에서 귀국하여 어업을 한 것도 기본적으로 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진 것 하나 없는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아내가 종이를 꺼내왔다. 서울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아내가 꾸역꾸역 인쇄소까지 가서 받아온 종이가 그때까지도 반 트럭이나 실려 있었다. 남의 물건을 그렇게 뺏어오면 되냐며 남편에게 핀잔을 먹으면서도 아내가 끝까지 싣고 온 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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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964, 캔버스에 유채, 130 x 194cm : 유영국의 1964년 첫 개인전 브로슈어의 표지화로 쓰였던 작품으로 작가 스스로 대표작으로 간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검정 등 원색들이 한 화면에 구사되어 있다. 함께 어울리기 쉽지 않은 이 색 들이 상호 팽팽하게 긴장하고 동시에 조화를 이루면서, 깊은 인상과 강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화면 가운데를 가로지른 노란 선은 또 다른 세계로 돌입하는 경계인 것처럼 특별한 감각을 일깨운다. 자 연의 신비가 탄생하는 순간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곱게 자라 장사라곤 해본 적 없는 아내가 시장바닥에 나무궤짝을 깔더니 그 위에 종이를 놓고 팔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피난민들도 다 내려오고 다시 일이 시작된 관공서 등에서는 종이가 필요했다. 시장에서 어떤 아낙이 좋은 종이를 판다는 소문이 돌자 관공서와 사무소 직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내는 똑똑하고 지혜로웠다. 관공서에서 꼭 필요한 종이를 자기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아내는 종잇값을 세 배나 비싸게 불렀다. 관공서 직원들이 무슨 종이가 그리 비싸냐고 하자, 이 값에 사지 않는다면 삼척에 가서 더 비싸게 팔겠다고 대답했다. 종이가 꼭 필요한 사람들은 별수 없이 사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내는 한 사람에게만 다 팔면 종이가 꼭 필요한 다른 사람들은 못 쓰게 될까 봐 어느 한 사람에게만 많이 주지 않고 골고루 나누어 팔았다. 시간이 지나자 종잇값은 훨씬 더 올라갔지만 아내는 처음의 값 그대로만 받았다.

유영국이 피난 내려와 양조장을 하게 된 건 이렇게 지혜로운 아내 덕이었다. 아내가 판 종잇값은 꽤 되었다. 그 돈으로 유영국은 죽변에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던 양조장을 다시 열기로 했다. 원래 양조장은 집안의 가업이었다. 잘나가던 시절에 유영국의 아버지는 양조장을 세 개나 운영했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 넷에게 북면과 죽변의 양조장 지분을 120주씩 공평하게 물려주었지만 어느 아들도 나서서 양조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중에는 아예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변 양조장에 직접 와보니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문짝까지 다 뜯어가 양조장은 뼈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유영국은 식솔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아직 겨울이 채 가지 않은 3월, 죽변항의 바람은 생각보다 거셌다. 밤이면 추위가 뼛속까지 밀려들었다. 터진 문을 겨우 포댓자루로 막고 찬 겨울바람을 맞으려니 추위는 더욱 혹독했다. 유영국은 추위에 떠는 아이들을 가슴에 품은 채 밤을 지새며 앞날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리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1.jpg?type=w1200 울진의 죽변 백사장에서. 1953년경, 유영국이 찍은 사진 (왼쪽부터 진, 자야, 리지)


유영국은 양조장이 잘 될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는 옛날에 양조장에서 일하던 기술자를 불러서 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아이가 셋이나 되는 상황에서 아내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양조장을 돌보면서 돼지도 키워 팔고, 오징어도 사서 말려 팔면서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다.

유영국의 예상대로 장사는 성공적이었다. 전쟁 통에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서는 복합적이었다. 남의 것을 뺏어서라도 먹으려는 간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물설고 낯선 타지에서 가슴속에 애환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 들려오는 어수선한 소식에 어떤 이들은 분개에 차서 술을 마시고, 어떤 이들은 슬픔에 차서, 어떤 이들은 헤어진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잊지 못해서 술을 마셨다. 저마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은 술로 마음을 달랬고, 술로 미어지는 가슴의 한을 풀었다.

게다가 죽변은 항구도시였다. 뱃사람들, 부두노동자들은 술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죽변은 동해안에서도 물고기와 남자와 돈이 가장 넘쳐나는 항구로 유명했다. 당연히 술집도 아주 많아서 술은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처음에 아내가 종이 판 돈으로 쌀 몇 가마니를 사서 술을 담기 시작한 것이, 몇 가마니는 금세 몇십 가마니로 불어났고 얼마 안 가 창고엔 쌀이 가득 채워졌다. 유영국의 사업 수완을 본 형제들은 아예 자기네 지분까지 돈을 받고 넘겼다. 주식 전부를 손에 쥔 유영국은 북면 양조장까지 사들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주 면허를 이어 소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피난민의 술이자 실향민의 술, 뱃사람의 술은 당연히 소주였다. 그때는 꼭 집을 떠나온 피난민이 아니더라도, 온 나라 사람들의 심정이 고향을 빼앗긴 영혼의 실향민처럼 서럽고 슬펐다. 남자들은 만나면 너나없이 술을 마셨고, 아침이건 낮이건, 슬프건 기쁘건, 그렇게 한 많고 아픈 시절을 소주로 달랬다.

유영국이 만든 소주 이름은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망향’이었다. 전쟁 통에 고향을 떠난 모든 사람의 심정을 담아 지은 이름이었다. 망향은 불티나게 팔리면서 유영국은 그야말로 가마니에 돈을 쓸어 담듯이 벌어들였다. 근처엔 그의 양조사업에 따라붙을 라이벌조차 없었다. 유영국은 그렇게 크게 성공 가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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