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막걸리 띄우던 방에서 이어진 고독한 작업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by 더굿북
1.jpg?type=w1200 작품 1953, 캔버스에 유채, 65×50cm


유영국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 돈은 살아가는 데 수단이 되어야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 돈이 없어도 그림을 못 그리지만 돈이 너무 많아도 그림을 못 그린다.

그래서일까. 돈이 벌리면 벌릴수록 유영국의 조바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유영국에게 돈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신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어야 했다. 돈은 너무 없어도 안 되지만, 대신 너무 남아돌아도 안 되는 것이었다. 더욱이나 돈을 버는 일에 이 소중한 인생을 다 써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줄 알면서도 하루 종일 돈 버는 일에만 시간을 허비하는 자신이 유영국은 견딜 수 없었다. 예술과 현실은 적절하게 어우러져야 하는데 그즈음 유영국의 삶은 돈 버는 일에만 치우쳐져 있었다.

그러나 이 속을 남들이 알 리 만무였다. 양조장 사업이 잘 나가자 도쿄에서 법학 공부를 했던 매부가 벌목사업을 권했다. 매부는 유영국의 명민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양조장은 자신에게 맡기고 강원도의 원시림을 개발하여 나무장사를 한 번 크게 해보라며 적극 권하는 것이었다. 당시 매부는 정치권에도 손이 닿아 있어 유영국이 성공하는 데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영국은 잘라 말했다.

금으로 된 산도 싫고, 금으로 된 논도 싫소. 나는 그림을 그릴 것이오.
2.jpg?type=w1200 작품 1953, 캔버스에 유채, 65×52cm


그즈음 유영국의 영혼은 점점 더 메말라 가고 있었다. 도쿄에서 귀국하여 뱃일을 했을 때처럼 다시 이곳에는 함께 예술을 할 사람은커녕, 예술에 허기진 그의 마음을 알아줄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유영국이 도쿄를 그리워한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곳에 가면 예술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자극을 받을 수 있고, 예술의 길을 함께 개척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 몇 명이라도 예술적 동지가 있다는 것은 예술가에겐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예술을 하기 위해선 최고의 스승과, 같은 길을 함께 걷고 서로 독려하며 나아가는 동지, 그리고 그 예술을 알아줄 명안의 평론가 내지 관객이 있어야 했다. 아니, 그중에서 최소한 하나라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죽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도쿄에서 귀국하여 답답하고 외로웠던 그때처럼, 그곳은 여전히 보이는 것 들리는 것 하나 없는 동해의 막다른 항구였다.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유영국은 술 도수를 재거나, 술을 내보낼 때나, 술 만들 양곡을 사러 가거나, 세무서 일을 처리할 때와 같이 중요한 일 외에는 모두 직원에게 맡기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죽변 양조장에는 작은 종곡실이 있었다. ‘종곡’이란 술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일종의 효소를 말한다. 고두밥을 지어 종곡을 섞어 일정 기간 발효시킨 다음 그 원액을 체에 걸러 도수에 잘 맞도록 물을 희석하면 술이 되었다. 그런데 술이 워낙 많이 나가다 보니 기존에 있던 종곡실로는 너무 좁아서 그 옆에 큰 종곡실을 따로 지었다.

유영국은 그 빈 작은 종곡실을 화실로 쓰기 시작했다. 캔버스조차 제대로 펼 수 없는 동굴 같은 종곡실에서 유영국은 하루 종일 아주 작은 그림들을 그렸다.

마치 사제가 어린 생명에게 세례를 주듯, 그 작은 그림들의 영혼을 정성스레 품고 쓰다듬으며 오래오래 생명의 빛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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