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1960년대 말부터 유영국은 본격적으로 ‘산’을 주요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왜 산을 그리세요?”
산 그림을 한참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물었다.
“뭐 가장 질리지도 않고, 아무리 오래 해도 싫증이 안 나니까….”
유영국의 산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 대상물로서 실물의 산이 아니었다.
유영국의 산은 그의 가슴에 사는 산이었다.
산에는 다 있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다채로운 색! 실로 조형의 원리를 실험할 수 있는 모든 요소뿐 아니라, 어둠과 빛, 구름과 바람, 적막과 풍요, 사계절의 풍부한 변화 속의 심오한 원리가 산에는 모두 다 담겨 있었다. 그래서일까. 산은 아무리 작업해도 지루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이르자 유영국의 산은 환상적인 총천연색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산은 그의 정신세계요, 완전한 자신이었다. 그의 마음이 행복하면 산도 붉고 아름답게 피어났으며, 그의 마음이 아프면 산도 흙빛의 얼굴을 한 채 슬프게 서 있었다. 세상이 환하면 그의 산도 환하고, 세월이 아프면 그의 산도 함께 울었다.
그에게 산은 비단 산만이 아니었다. 바다도 산이요, 해와 달, 들판과 낙조도 모두 다 산이었다. 산은 우주 전체이자 생명 그 자체였다.
어렸을 때부터 유영국은 산을 참 좋아했다. 산을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고향에 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경북 울진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자라는 동안 늘 바다와 산을 가까이에서 보고 즐길 수 있었던 환경 때문에 산을 그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산을 주로 그리고 있다.
고향에서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올랐던 산은 응봉산이었다. 당시에는 교통도 불편하고, 지금처럼 취미나 운동 삼아 산을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응봉산에는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다. 나무를 베거나 약초나 나물을 캐러 가는 것이 아닌 이상, 아까운 밥 먹고 배 꺼지게 쓸데없이 산을 배회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유영국이 산을 오르면 산기슭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은 그를 약초꾼으로 알았다.
산 1960, 캔버스에 유채, 136 x 211cm : 1960년대 유영국은 당당한 자신감과 자유로운 표현력으로 생애 최고의 작품들을 쏟아냈다. 특히 1960년대 전반 그의 작품은 ‘대자연’을 거시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며, 경외로운 자연의 힘을 ‘예술’로 표현해내려는 예술가의 도전을 보여준다. ‘산’은 이 무렵 유영국이 필생의 테마로 삼았던 소재다. 그는 스스로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다채로운 색!”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실제로 산에는 조형의 원리를 실험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가 있을 뿐 아니라 어둠과 빛, 구름과 바람, 적막과 풍요, 사계절 등 풍부한 변화와 심오한 원리가 있다. 이 작품 <산>은 어둡고 깊은 숲 속에서 저 멀리 눈이 내린 원경의 산맥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점을 택하고 있다. 사실적으로 대상을 그리지 않았음에도 깊은 숲 속의 울림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유영국이 유독 응봉산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 산에 자생하던 푸르고 큰 금강송 때문이었다.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응봉산의 기개도 기개였지만, 그곳엔 금강소나무가 군락을 이뤄 산의 정취를 더욱 빼어나게 했다. 능선을 따라 천년의 비바람 속에서도 곧고 꿋꿋하게, 마치 도열한 듯 줄지어 서 있는 금강소나무들을 바라보노라면 유영국은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강원도 남부와 경상북도 북부 일대에서만 서식하는 금강송은 소나무 중에서도 가장 곧고 높이 자라는 소나무로 유명하다. 금강송은 줄기도 기울거나 비뚤어지지 않고 위쪽에만 짧게 달렸다.
유영국은 키가 큰 것에서부터 기울거나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게 하늘로 뻗어 올라간 금강송의 자태가 자신과 꼭 닮은 것 같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화려한 가지를 드리운 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여느 소나무들과는 달리, 잔가지는 다 떨군 채 독야청청 꼿꼿이 솟아 있는 금강송. 이리 굽고 저리 굽는 소나무들과는 달리 곧고 곧은 마음 하나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는 금강송의 고집스런 모습이 유영국은 좋았다.
그래서인지 응봉산에 들어 금강송 사이를 지나노라면 심란하던 마음도 안정되고 미진했던 각오도 새롭게 다져지곤 했다. 그렇게 한 발 두 발 오르다 보면 어느새 1,000미터 고지의 응봉산 정상에 다다랐다. 응봉산의 정상은 언제나 그에게 사시사철 다른 빛깔과 음성으로 멀리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첩첩한 산맥과 동해를 무한히 펼쳐 보여주었다. 그렇게 산의 정상에서, 유영국은 산을 가슴에 품으며 스스로 산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다. 유영국의 산은 밖이 아니라 그의 안에 있는 산이었다. 자신이 잉태하고 자신이 기른 산,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산속에 들어가 산을 못 보고 내려오듯이, 산속에 들어서면 산을 그릴 수 없다. 산에서 내려와서야 비로소 원거리의 산이 보이듯이, 멀리서 바라봐야만 산을 그릴 수 있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 그림의 주제는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자연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산이었다.
유영국은 추상 속에서 자신만의 자연을 점점 구체화했으며, 그렇게 하여 구체적으로 귀납 된 자연이 바로 산이었다. 장엄하면서도 경쾌하고 환상적인 그만의 추상의 산.
유영국은 점점 더 순도 높은 색으로 절묘한 산들을 아름답게 탄생시켰다. 강렬한 원색은 태초의 원시림처럼 빛을 발했고, 색의 대비가 극명할수록 산은 더욱 신비하고 고적해졌다. 가까이 다가가면 베일 듯 단호하면서도 결코 날카롭지만은 않은, 모든 것을 다 품은 듯한 동양의 산세가 타는 듯한 고순도의 색채와 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유영국의 산은 강렬하고 화려하면서도 고독하고 슬펐다. 그러나 고독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따뜻했다. 이렇듯 강렬한 원색 속에서 알 듯 모를 듯 묻어나는 동양의 애잔함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깊은 감동과 함께 숙연함까지 느끼게 했다.
1959년에 제작한 <산>은 알 수 없는 선들의 조합이 아닌 분명한 의미가 있는 산, 주체적 의지가 있고, 할 말이 있는 그런 산이었다. 그렇게 사조적 추상을 딛고, 사조적 추상을 넘어 유영국은 드디어 순수 추상의 ‘산’의 화가로 우뚝 섰다. 그의 나이 어느덧 오십에 이르고 있었다.
이즈음 유영국은 더욱 혼신을 다해 그림에 몰두했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여름이었다. 몇 날 며칠 비가 쏟아지는 장마철에 홍수마저 덮쳤다. 유영국은 습기 가득한 화실 한편에 첩첩이 쌓아놓은 그림들이 걱정되었다. 밤새 잠을 설친 그는 해가 뜨자마자 화실로 뛰어가 그림을 꺼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벽 안쪽에 두었던 그림들은 이미 다 형편없이 상해 있었다.
망연자실하여 한참 동안 그림을 내려다보던 유영국은 도저히 못쓰게 된 100호 크기의 그림 열다섯 점을 들고 마당에 나왔다. 그리곤 캔버스에서 그림들을 한 점 한 점 뜯어내어 드럼통에 넣고 태우기 시작했다. 마치 다비식을 치르듯, 그림들이 다 타서 재가 될 때까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시 유영국은 누가 감시라도 하듯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밖에 나가는 시간도 줄이면서 최대한 모든 시간을 그림 그리는 데만 집중했다. 앞으로 건강이 나빠질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유영국은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반드시 산속에 들어가 산을 그리지 아니해도 산을 생각하며 또 상상의 나래를 좇아 그 무궁한 형태의 색감의 대비 등의 작업은 내 생애 끝까지 따를 것이다.
‘산’을 테마로 한 그림은 1955년 제4회 《국전》에 <산 있는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처음으로 출품된 이후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