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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때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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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최소한 바보 같은 기대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은가.

경비실에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두 개의 철문을 지나 500미터 정도 걸어가다 보면 단층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넓은 주택가가 나온다. 집들은 가로세로 교차되어 있는 작은 길에 의해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정중앙에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두 번째 교차로에 다다를 때쯤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때 왼쪽으로 돌아 다시 두 번째 교차로가 나올 때까지 걸어가 오른쪽으로 돌면 초롱꽃이 피어 있는 커다란 나무가 보인다. 나무 뒤가 바로 지청(繼承)의 집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집에 가는 길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 지청의 집에 놀러 가려다가 길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자 어느 날 지청이 지도를 자세히 그려줬다. 지도의 오른쪽 남는 공간에는 내가 쉽게 외울 수 있는 시로 가는 길을 적어놓았다.

작은 길을 따라 걷는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돌면 그 집에는 개가 산다네.
겁먹지 말고 계속 걸어간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그 집에는 개가 없다네.
그리고 커다란 나무 뒤, 그곳이 바로 우리 집이라네.

나는 몇 번 소리 내어 읽어 보고 나서 말했다.

“이게 무슨 시냐?”

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우리 할아버지 말씀이 운율이 있고 짧은 글에 내용을 정확히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시라고 하셨어.”

당시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질문을 던졌을 때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는 사람은 신뢰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지청은 나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다리들 중 하나가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우리넷은 운동장 평행봉에 나란히 앉아, 부모님들과 함께 집에 가는 친구들을 구경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모두 학교를 빠져나갔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병원에서 일하고 있어서 늘 바쁘셨다. 그래서 한 번도 학교로 나를 데리러 온 적이 없으셨다. 지청은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저녁 준비를 하시느라 그를 데리러 오지 못 했다. 나머지 두 명은 샤오투(小土)와 샤오황(小黄)쌍둥이 형제였는데 부모님이 사업을 하느라 바빠서 역시 데리러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샤오투와 샤오황 둘만 같이 다녔는데 그들이 지청을 발견하고, 지청이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끝도 없는 망망대해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기뻐했다.

이처럼 내 인생의 첫 친구들은 외로움이 엮어준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그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짠하다. 당시 우리는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궁금한 것 투성이였다. 우리는 만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지청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주려고 노력했다. 그 답이 맞든 틀리든 어쨌든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은 찾는 것이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다른 친구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며 우쭐했다.

“지청, 왜 내가 짝꿍이랑 얘기할 때마다 친구들이 놀리는 걸까?”

“우리 할아버지 말씀이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면 그건 너를 질투하기 때문이랬어.”

“지청, 왜 옆 반 왕테뉴는 친구들을 자꾸 못살게 구는 걸까?”

“그 반에는 아무도 반항하는 애들이 없어서 그래. 우리 반에 와서 한번 해보라 그래.”

“지청, 만약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쩌지?”

“그럼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되지.”

“지청, 왜 그리스신화의 전사들은 아무리 싸워도 쉽게 죽지 않는 걸까?”

“만약 한 번에 다 죽어버리면 네가 매주 만화책을 빌리겠어?”

모든 질문은 지청과 상관없는 것이었고 심지어 어떤 것은 답을 꼭 찾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질문을 할 때마다 지청은 최선을 다해 답을 했고 나는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청, 너는 어떻게 그렇게 모르는 것이 없어?”

“할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야.”

“나도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왜 아무것도 가르쳐주시지 않는 걸까?”

“나는 할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잖아. 나도 너희가 했던 것 같은 질문을 할아버지께 했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해주셨어.”

“그렇구나. 할아버지와 같이 산다니 정말 부럽다. 그럼 너희 부모님은 어디 계셔?”

“……“

지청의 표정이 마치 전등의 스위치를 끈 것마냥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늦었다. 어서 집에 가자.”

지청은 서둘러 평행봉에서 내려와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는 앞만 보고 걸어갔다.

샤오투와 샤오황이 내게 속삭였다.

“너 지청이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랑만 살고 있는 거 몰랐어?”

“알고는 있었는데….”

“그럼 대체 부모님 이야기는 왜 물어본 거야?”

“난 그냥 부모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싶어서….”

“너 바보 아니야?”

샤오투와 샤오황은 평행봉에서 내려와 서둘러 지청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자책보다는 지청처럼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도 대답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날 밤 나는 지청이 걱정되어 베란다에 나가 한참을 서 있었다. 엄마가 물으셨다.

“거기서 뭐해?”

“제 친구는 부모님이 안 계시대요. 만약 저도 엄마, 아빠가 안 계시다면 어땠을까 생각 중이었어요.”

엄마가 대답하셨다.

“넌 분명 좋아했겠지.”

“아…….”

엄마는 분명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말을 분명히 이해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좋은 관계는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관계는 한 사람만 이해하고, 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등굣길에 저 멀리 지청이 보였다. 나는 눈 딱 감고 그의 앞으로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가방에서 삶은 달걀 네 개를 꺼내며 말했다.

“자, 너 두 알, 나 두 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달걀을 건네받아 자신의 머리에 깬 다음 껍데기를 까서 먹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해.”

지청이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우리 엄마, 아빠는 일하느라 굉장히 바쁘대. 나중에 바쁜 일이 모두 끝나면 돌아올 거라고 하셨어.”

그는 이 대답으로 나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지청이 다시 말했다.

“사실 나도 우리 부모님이 언제 돌아오실지 잘 몰라. 내가 부모님에 관한 질문을 할 때마다 할아버지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묻고 싶어도 꾹 참고 있어.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할아버지도 나도 기분이 나빠질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그때 우리 나이가 열한 살이었는데, 지청은 굉장히 어른스럽고 속이 깊었다.

“너 달걀 다 먹었어?”

지청은 달걀 두 알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내게 물었다. 내가 주머니에서 한 알을 더 꺼내 주었다.

“너는 어서 숙제나 베껴. 이 달걀은 먹을 시간이 없을 테니까 내가 대신 먹어줄게.”

지청이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지청과 친구가 된 이후로 나는 매일 아침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숙제를 베꼈다. 그리고 내가 숙제를 베끼는 동안 지청은 내가 미처 다 먹지 못한 아침을 대신 먹어줬다.

“너희 할아버지는 아침밥을 안 만들어주셔?”

“할아버지를 새벽부터 깨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내가 저녁을 더 많이 먹겠다고 했어.”

“그렇구나.”

나는 그때부터 아침마다 배가 굉장히 많이 고픈 척해서 엄마가 달걀을 더 많이 삶도록 했다.

그날 숙제를 다 베끼고 나서 나도 모르게 갑자기 지청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지청, 부모님을 찾아볼 생각은 안 했어? 우리가 부모님 찾는 것을 도와줄까?”

나의 이런 제안은 잔잔한 그의 마음에 불을 붙였고 거센 바람을 일게해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그 거센 불길에 내 얼굴마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이번 주말에 너희가 우리 집에 와서 할아버지를 맡아줘. 할아버지가 늘 잠가 놓는 서랍이 있는데 아마 그 안에 부모님에 관한 물건이 들어 있을 거야.”

그 주 내내 우리 넷은 엄청난 일을 벌인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의욕이 넘쳤다.

“만약 그 안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해?”

“그럴 리 없어. 우리 아빠 이름이 지원펑(繼文峰)인데 3일에 한 번, 길어도 5일에 한 번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 같아. 할아버지는 늘 나 몰래 보시고는 서랍 속에 넣고 잠가 버려.”

“그럼 엄마는?

“아빠의 소식을 알면 엄마의 소식도 알 수 있겠지.”

“만약 정말로 부모님을 찾는다면 만나러 갈 거야?”

“……”

긴 침묵이 이어졌다.

꽃피는 계절, 소년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찾으려고 일어나니 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막 열 살을 넘긴 우리는 그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줄만 알았지 그 일의 결과가 어떨지, 당사자의 감정은 어떤지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

어쨌든 우리는 주말에 지청을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다. 철문을 지나 작은 길을 따라가다 보니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초롱꽃이 보였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지청의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만나 본 할아버지들 중 가장 열성적인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쟁반 가득 쌀강정과 과일을 내어 오시고 중요한 손님을 대접하듯 차를 직접 따라주셨다. 우리는 이 집에 온 목적을 생각하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청은 우리 셋을 소개시켜줬고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며 일일이 손을 잡아주셨다. 할아버지의 손은 크고 힘이 있었으며 아주 따뜻했다. 샤오황이 할아버지의 손을 보고 말했다.

“와, 손이 정말 크시네요.”

그러자 지청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군대에 계실 때 중대장님이 할아버지의 큰 손을 보고는 포탄을 절대 떨어뜨리지 않겠다며 포병으로 임명하셨대.”

우리 셋은 존경스러운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의 주의를 끌어야 하는 임무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말이다.

“할아버지, 얘들에게 포병 시절의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역시 우리 중에 지청의 머리가 가장 쓸 만했다.

나는 지청이 잘하고 있을지 신경이 쓰여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반면 샤오황과 샤오투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완전히 잊은 듯했다. 둘은 심지어 내가 잘 듣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기까지 했다.

“들었어? 할아버지는 엄지손가락으로 적군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잴 수 있대. 정말 대단하지 않아? 할아버지, 어떻게 하는지 저희도 가르쳐주세요!”

“물론이지.”

할아버지도 신이 나서 이야기하느라 지청이 벌써 십 분 넘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 했다.

나는 지청 걱정을 하느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 했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학교 수업보다 더 지루했다. 하지만 샤오투, 샤오황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거리를 재는 시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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