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
차이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베이징에 있는 학교에 합격하면 더 이상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오는 일은 없겠구나.”
꼬마 차이도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 이제 여기 안 올 거예요?”
그러자 아주머니가 아저씨를 나무라셨다.
“베이징에 있는 학교에 합격하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당신은 뭐 사람들이 평생 우리 집에서만 밥을 먹을 줄 알아요? 우리 집 식구들 말고는 여기서 평생 밥 먹는 일이 좋은 일은 아니라고요. 한 끼에 5위안 하는 밥은 2년 정도 먹었으면 됐어요. 이제 한 끼에 50위안, 500위안 하는 밥도 먹고 그래야죠. 안 그래요?”
차이 아저씨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셨다.
“아주머니, 만약 베이징에 가게 되더라도 창사에 오면 꼭 밥 먹으러 올게요.”
시간이 흘러 어느덧 대학원 합격 발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무렵 친구 둘이 찾아와 함께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요리 네 개를 시켰는데 주문한 요리가 모두 나오고 나서 돼지족발탕과 생선요리 한 접시가 더 나왔다. 두 요리 모두 고급 요리였기 때문에 못해도 10위안은 훨씬 넘는 것들이었다.
내가 황급히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무래도 음식이 잘못 나온 것 같아요. 저희는 이런 요리를 시킨 적이 없는데….”
아주머니가 대답하셨다.
“이런 날은 원래 요리 한 접시씩을 더 주는데 친구들이 왔으니 특별히 하나를 더 준 거란다.”
“이런 날이라니요?”
“오늘이 27일이니까 네 생일 아니니? 우리 집에서는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그날 요리 한 접시를 더 준단다. 너만 주는 것이 아니니 어서 먹으렴.”
“제 생일을 어떻게 아셨어요?”
이 말을 하는 순간 아주머니에게 내 신분증 사본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하지만 신분증 사본을 맡겨 놓은 이유는 내가 돈을 떼어 먹고 갈까 봐 그런 것 아니었던가? 아주머니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생일을 기억해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맥주를 시켜서 몇 잔 마시고는 술기운에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술을 한 잔 따라 드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나라는 인간은 평소에는 말을 잘 못하면서 술이 들어가면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곤 한다. 나는 맥주잔을 들고 아주머니에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를 처음 봤을 때는 인정미가 없어 보여서 싫었는데 나중에 샤오쟈오에게 외상을 허락해주는 걸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는 둥, 그런데 신분증을 복사해오라는 말에 잠깐 실망했었다는 둥 지금까지 느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아주머니는 내 얘기를 듣고 화를 내는 척하면서 술을 한 잔 따라주셨다. 내가 술잔을 비우자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어차피 돈이 없는데 신분증이 다 무슨 소용이야. 설마 내가 정말로 학생들한테 밥값을 물어내라고 할 것 같았니? 내가 신분증을 가져오라고 한 건 너희들이 아직 도움이 필요한 애들인 것 같아서 그랬단다. 그래도 나한테 신분증을 맡긴 학생들은 참 착한 애들이야.”
“하하하. 아주머니가 나보고 착한 아이래!”
내가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그중 여자친구 하나는 아주머니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고 그 모습을 본 나도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꼬마 차이에게 말했다.
“고마워. 그때 네가 이 오빠 그릇에 이름을 적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나지 못했을 거야.”
얼마 후 대학원 합격 발표가 있었는데 나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때 한 친구가 내가 쓴 소설을 가지고 베이징에 가서 교수님을 직접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어쩌면 특기생으로 받아줄 수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말대로 베이징에 갔지만 입학은 실패했고 대신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창사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날 나는 차이 아저씨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겸 마지막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꼬마 차이는 내가 떠난다는 말에 울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저씨는 기뻐하면서도 많이 아쉬워했고 아주머니는 아저씨에게 내가 먹을 요리를 몇 개 더 해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꼬마 차이에게 소리치셨다.
“너 방에서 안나오고 뭐해! 너도 이 오빠를 본받아서 나중에 꼭 베이징에서 일해야 한다. 알았지?”
밥을 먹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내 신분증 사본을 돌려주며 진작에 돌려줬어야 하는데 깜박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말했다.
“그냥 기념으로 갖고 계세요. 제가 나중에 또 외상을 부탁해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하하하.”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이거나 가져가. 여기 나와 있는 네 정보는 이미 다 외웠기 때문에 이제 필요 없어.”
나는 떠날 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저 이제 정말 갑니다. 일 년에 한 번은 꼭 찾아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나는 2년 동안 따뜻한 밥을 지어준 차이 아저씨에게, 내 그릇에 이름을 적어준 꼬마 차이에게,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야박하지만 누구보다 인정이 많았던 아주머니에게 차례로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막상 베이징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너무 바빠서 창사에 갈 시간이 없었다. 혹시 갈 일이 생겨도 기차를 타고 고향인 천저우로 바로 내려갔고 창사에 들르는 일은 없었다. 일을 시작하고 3년 차가 되어서야 프로그램 녹화를 위해 드디어 창사에 가게 되었다. 나는 출장 기간 중에 특별히 시간을 내어 차이 아저씨네를 찾아갔다. 손에는 베이징에서 사온 특산품들을 가득 들고 꼬마 차이가 얼마나 자랐을까 상상하면서.
하지만 도착해 보니 차이 아저씨네 밥집은 사라지고 옷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옷가게 주인에게 차이 아저씨네 소식을 물으니 이미 몇 년 전에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장사가 굉장히 잘 되지 않았나요?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문을 닫을 수가 있어요?”
옷가게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 가게는 벌써 3년 전에 문을 닫았어요. 애초에 적자가 많이 나서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사정이 어려운 학생 몇 명에게 싼 가격에 한 달 치 식권을 끊어줬나 봐요. 그러자 그게 소문이 나서 더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밥집은 계속 적자에 허덕였어요. 그 집 부부는 고민한 끝에 어린 학생들을 굶길 수는 없다며 처음 식권을 끊어 준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장사를 계속하자고 했었죠. 당신도 그때 식권을 끊었던 학생들 중 하나인가 봐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차이 아저씨네 가게를 떠나기 전에 그 앞에 서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구경했다. 분명 나처럼 이곳에 와서 지난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다. 누군가는 남은 밥과 반찬을 몰래 싸가던 일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어렵게 외상을 부탁하던 일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고기를 더 넣어주시던 아저씨의 모습을 떠올리겠지.
사람마다 각자의 기준에서 삶이 힘겹다고 느끼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절에는 누군가 작은 관심만 기울여줘도 하루 종일 마음이 따뜻하고, 누군가의 사소한 친절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득 품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차이 아저씨네 가족은 내 인생에서 정말로 감사한 사람들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물을 많이 부어서 만들었다는 토마토계란탕이 생각난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아저씨네 가족이 베푸는 진심 어린 관심과 친절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선의의 거짓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