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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02. 2017

09. 아버지가 남긴 계란 흰자

<오늘은 내 인생의 첫날이다>

“내 아버지가 누구였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버지를 어떤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느냐는 점이다.” _앤 섹스튼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 내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요즘도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어릴 적 일을 매우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여기저기 이사도 많이 다니고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유년기를 미국에서 보낸 경험도 있다 보니 유년기 기억이 더 또렷한 것 같다. 그중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 6살 때의 일이다. 

대구지점 발령으로 대구에서 네 가족이 단칸방에 살다가 다시 서울로 막 올라온 직후였다. 아직 어렸기에 안방에서 부모님과 나, 여동생까지 네 식구가 함께 잤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동생은 여전히 잠들어 있고 아버지는 말끔히 양복을 차려입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아침을 준비했는데 ‘계란프라이 하나에 우유 한 잔’이었다. 지금이야 흔하디흔한 계란이지만 1975년에는 웬만큼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면 계란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니 배도 고픈데 맛있는 계란프라이가 있으니 6살 꼬마 눈에 어떻게 보였겠는가. 아버지 식사하는 상 앞에 앉아서 계란프라이 한번 쳐다보고 아버지 얼굴 한번 쳐다보며 군침을 삼켰다. 그

런 아들을 보고 계란프라이를 다 먹는 부모가 과연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우유 한 잔만 들이키고는 계란프라이를 먹지 않고 일어나며 “충인아, 이건 네가 먹어라” 하는 게 아닌가. 정말 ‘이게 웬 떡이냐?’라는 심정으로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정말 꿀맛이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그 어린 나이에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아버지 출근 시간이 되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계속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애들은 따로 아침으로 만들어 줄 테니 계란프라이 다 드시고 가세요.” 

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아버지는 젓가락으로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정교하게 발라내고는 노른자만 후루룩 드시고 흰자는 남겨 놓고 출근을 했다. 나는 쪼르르 달려가 그 흰자를 먹어 치웠다. 그렇게 나는 아침마다 아버지가 남긴 흰자를 먹는 낙으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출근하자마자 어머니가 불같이 화를 내며 매를 들었다.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아버지께서 드시는 아침 식사를 넘보고 그래? 다음부터 그러지 마!” 

6살 꼬마 아이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나는 그날 어머니에게 호되게 매를 맞고 너무나 무서워 그 다음 날부터는 아침에 눈을 떠도 그냥 자는 척 누워 있었다. 아버지도 의아했을 것이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밥상에 턱 받치고 있어야 할 아이가 그냥 자고 있으니 말이다. 그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충인이가 어제 많이 뛰어놀아서 피곤해서 그래요. 계란프라이는 다 드시고 가세요. 애들 일어나면 따로 만들어 줄 거예요.”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는 계란프라이를 다 먹고 출근했다. 일어나 보니 늘 남아 있던 흰자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한 대로 나를 위해 ‘따로’ 계란프라이를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그날 후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았고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아버지 출근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없었다. 

이것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장면이다. 고등학교 때 사춘기에 접어들어 어머니 속을 썩일 무렵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나를 앉혀 놓고는 어릴 적 아버지 계란프라이 먹는다고 엄마가 혼낸 적이 있는데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그날 매 맞은 사건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트라우마’였기 때문이었다. 

“충인아, 그때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아니?” 

하면서 어머니가 사건의 진상과 내막(?)을 이야기해 주셨다.

당시 우리 집은 말단 행원이었던 아버지의 박봉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포함한 여섯 식구가 살아갔다. 연년생인 우리 남매가 어렸을 때는 분유 살 돈조차 없어 우는 두 아이를 업고, 안고 아버지가 여기저기서 분윳값을 융통해 올 때까지 골목 어귀에서 기다린 적도 많았고, 없는 살림에 작은아버지 장가보낸다고 목돈 마련도 해야 했고,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당시 은행에서는 금융사고가 나면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변상해 넣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렇게 빠듯한 생활 때문에 아버지는 점심 먹을 돈이 없어 동료들이 점심 식사하러 갈 때 고객과의 약속이나 업무 핑계를 대고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면서 끼니를 굶었다고 한다. 아무리 점심값을 챙겨 드려도 고스란히 월말에 그 돈을 내놓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는 아침 한 끼라도 제대로 계란프라이라도 먹고 가길 바랐는데, 철없는 아들이 아침마다 그걸 날름 뺏어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매를 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충격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우리 집이 부자는 아니어도 나름 잘사는 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용돈이 적다고 불평불만이나 늘어놓던 사춘기였다. 그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후 조금씩 철이 들었다. 우리 부모님들이 힘든 세월을 고되게 살아오면서 자식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계란프라이를 먹으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흰자와 노른자를 정교하게 나눠서 먹는 습관이 있다. 철없던 꼬마가 이제는 훌쩍 자라 그때의 꼬마보다 훨씬 큰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두게 되었다. 그 아들이 얼마 전 내가 계란프라이 먹는 모습을 보더니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아빠는 어떻게 젓가락으로 노른자와 흰자를 그렇게 잘 나눠서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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