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Mar 02. 2017

09. 즐거웠던 어린 시절의 추억

<그때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기억을 간직할 수는 있다.
그때 그 시간, 그때 그 장소, 그때 그 만남,
그때 그 맛, 그때의 날씨와 옷까지
기억 속의 아름다웠던 그 시절은 변하지 않는다.

‘팡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재작년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비보를 접하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동행한 친구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 나는 휴대폰에 전달된 소식을 보여줬다. 우리 둘 다 기차 좌석에 몸을 기대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팡 할머니에 대한 모든 기억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28년 전,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다. 팡 할머니는 학교 남문 모퉁이에서 초두부(중국식 튀긴 두부 요리-역주)를 파는 연세가 꽤 높으신 할머니셨다. 학교가 끝나고 한 조각에 8펀分(10펀은 1마오이고, 10마오는 1위안이다-역주) 하는 초두부 리어카 앞에는 언제나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팡 할머니네 초두부는 정말 맛있었다.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초두부의 맛이 떠오를 정도다.

두부가 노릇하고 바삭하게 튀겨지면 할머니는 젓가락으로 한 번 찔러 구멍을 냈다. 구멍 사이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올 때 그 위로 양념을 부으면 열기는 다시 두부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양념이 골고루 밴 두부에서는 파, 마늘, 생강 냄새와 진한 콩 냄새가 골고루 났다.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초두부를 먹고 나면 힘이 불끈 솟았고, 겨울에 모락모락 김이 날 때 한 입 먹으면 순식간에 몸이 따뜻해졌다.

초등학교 때 내 용돈은 아주 적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4마오를 주고 다섯 조각씩 사 먹을 때 나는 1마오로 한 조각밖에 먹지 못했다. 조금 여유가 있을 때도 두 조각이 최대였다. 나는 거스름돈을 차곡차곡 모아 8펀이 모이면 또 한 조각을 사 먹었다.

처음에는 긴 줄을 서서 한 조각밖에 사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그래서 내 차례가 돌아올 때쯤이면 1마오를 꺼내서 준비하고 있다가 옆 사람이 한눈팔고 있을 때 재빨리 팡 할머니에게 돈을 건네며 한 조각만 달라고 말했다.

팡 할머니는 두부 한 조각을 주걱으로 작게 잘라 아홉 조각을 만든 다음 그릇에 넣고 양념을 골고루 뿌린 뒤 봉투에 담아 주셨다. 봉투를 건네받을 때면 언제나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이쑤시개로 작게 자른 두부를 한 조각 한 조각 천천히 먹고 나면 늘 커다란 두부 아홉 조각을 먹은 것같이 든든했다.

봉투가 묵직했던 이유는 내가 두부 한 조각을 살 때마다 할머니가 국자로 양념통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고추, 배추절임, 무채 등의 재료들을 건져 함께 넣어주셨기 때문이었다.

팡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학교 남문 모퉁이에서 초두부를 파셨다. 할머니는 아이들의 이름을 대부분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이 할머니께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경우도 있었다.

“팡 할머니, 우리 아이가 오늘 초두부 사러 왔었나요?”

그러면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30분 전쯤에 사 갔어요. 친구들이랑 저기 언덕 쪽으로 걸어갔어요.”
“아니요, 오늘은 안 왔어요. 애들 말로는 당번이라 아직 교실에 남아있다고 하던데요.”

그럴 때면 팡 할머니는 초두부 리어카 주인이 아니라 은밀한 정보원 같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할머니의 초두부 리어카가 있는 곳에서 친구들과 자주 만났다. 먼저 도착한 친구들은 리어카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앉아 먼저 초두부를 먹기 시작했고 늦게 오는 친구들은 전화로 주문하기도 했다.

“팡 할머니께 내가 도착하기 전에 절대 가시면 안 된다고 전해줘. 내가 바싹 튀긴 두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거야.”

그때 초두부 가격은 한 조각에 1.5마오가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저렴한 편이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매일 팡 할머니의 초두부를 먹으러 가지는 않았지만 가끔 생각이 날 때면 친구들을 불러내 함께 먹으러 갔다. 그곳에 가면 같은 학교에 다녔던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느 날 왜 항상 팡 할머니 혼자만 나와 계신지 궁금해졌다. 늘 혼자서 리어카를 끌고 나왔다가 밤이 되면 가로등 밑에서 홀로 조용히 정리하고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셨다. 어렸을 때 누군가는 팡할머니를 보고 아침에 나왔다가 밤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마법사일 거라고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팡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팡 할머니는 서른 몇 살에 뒤늦게 결혼을 해서 그다음 해 아들을 낳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 것을 꿈꾸었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할머니의 남편이 도박에 빠진 것이다. 돈을 따는 날에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돈을 모두 잃은 날에는 집에 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돈을 주지 않으면 남편은 할머니와 아들을 때렸다. 할머니는 모든 희망을 아들에게 걸었지만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려온 탓에 일찍이 학교를 그만두고 밖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 아빠와 아들은 둘 다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하루 종일 바깥에서 방황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잠을 자러 들어왔고 돈이 떨어지면 팡 할머니를 못살게 굴었다. 그렇게 팡 할머니가 학교 앞에서 초두부를 팔아 힘들게 모은 돈을 남편과 아들은 유흥비로 모두 탕진했다.

그때 우리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른들의 사정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팡 할머니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 친구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타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방학이나 명절 때 고향에 돌아가 만나자는 약속을 하면 누군가는 꼭 팡 할머니의 초두부 이야기를 꺼냈다. 한 번은 친구들 중 한 명이 팡 할머니와 찍은 사진을 모두에게 전송하며 아래에 이렇게 덧붙였다.

“팡 할머니네 초두부 가격이 올랐어!”
“올릴 때도 됐지. 요즘 물가가 얼마나 비싼데! 그래서 지금은 얼마라는 거야?”
“한 조각에 2마오야.”
“샤오우, 너 다음에 가면 많이 좀 팔아드리고 와. 날씨도 이렇게 추운데 얼마나 힘드시겠니?”
“알겠어. 다음에 다 같이 가자. 아직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더라고.”

친구들은 설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면 모두 팡 할머니의 초두부 리어카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참, 샤오우 너 다음에 가면 팡 할머니한테 방학 때도 계속 나와서 장사를 하시느냐고 여쭤봐.”
“그래, 알았어.”

초등학교가 방학을 하고 나면 초두부를 먹으러 오는 학생들의 발길이 끊기기 때문에 팡 할머니는 장사가 어려워졌다. 우리는 할머니가 안 계시면 어쩌나 걱정하며 학교 앞을 찾아갔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팡 할머니의 리어카는 예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할머니는 기름 냄비 위에 손을 얹고 추위를 달래고 계셨고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몇몇 손님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는 멀리서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셨다.

“우아, 다행이다! 방학인데도 계속 계시는구나!”

우리는 우르르 몰려가 초두부를 한 사람당 다섯 조각씩 주문했다. 두부를 튀기는 동안 친구들은 각자 자신의 근황을 팡 할머니에게 전했다.

팡 할머니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모두 잘 되어서 정말 기쁘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00. <그때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 연재 예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