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륜도 천륜도 갈라놓은 전쟁
어느 날 한 유가족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이유는 6·25 당시 강원도 인제 현리 지역에서 전사한 참전용사를 찾아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찾아온 사람은 예비역 육군중사 정모로 자기 부인이 찾고자 하는 분의 딸인데, 6·25전쟁 당시 한 살이었고 아버지가 참전한 대략적인 전투 지역을 알고 있는데 꼭 좀 찾았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위가 장인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우리는 그해 8월에 현리 지역으로 탐사활동을 나갔습니다. 현리 용포교 일대에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당시 전투 상황을 수소문하면서 산자락에 있는 외딴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이 집주인 안○○께서 소중한 제보를 해 주셨습니다.
“귀한 손님이 오실 텐데, 세 번째 분이 바로 그 손님이 찾는 사람이다.” 어젯밤이 바로 몇 해 전 타계한 본인 아버지 제사였는데, 그날 밤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내일 귀한 손님이 찾아온다. 군인을 찾을 것인데, 3번째 키가 가장 작은 사람이 찾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연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951년 5월 중순 당시, 저 안○○씨는 11살이었는데 어느 날 학도병들이 수없이 용포교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총소리,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다리 주변에 있던 수많은 차량이 불타고 그 불길은 바로 앞에 보이는 1,500m의 방태산 꼭대기까지 치솟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군인이 전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내려다보이는 논밭 주변엔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본인 집 창고 안으로 한 군인이 숨어들어 왔습니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있었는데 밤인데다 무섭기도 하여 나가 보지도 못하고 있다가 다음날 아버지를 따라 살며시 문을 열고 확인해 보니 죽어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 보니 고통을 참느라고 손으로 얼마나 땅을 움켜잡았는지 손톱이 다 빠지고 광 바닥은 깊게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뒷산에서 칡 순을 끊어 와서 목에 걸고 군인을 끌어당겨 밖으로 나갔고, 이어서 집 뒤 소나무 숲 속에 파여 있던 방공호로 밀어 넣었습니다.
바로 찾고 있는 김○순 일병이다. “많은 군인이 전사한 그날, 오전에 한 군인이 우리 집에 왔었습니다. 고향이 순천이라 했고,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얼핏 바라본 명찰에서 김○순이란 이름을 보았습니다.” 김○순 일병, 그가 바로 안○○ 씨의 창고 안에서 숨진 군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묘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오기 1년여 전에 어느 할아버지가 찾아와 똑같이 김○순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분도 순천 사람이었는데, 이곳 전투에 참가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같은 동네에서 온 친구이며 친척인 김○순이 바로 이 일대에서 총을 맞았다는 내용의 말을 남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할아버지께서 이곳 현리를 찾게 된 것은 이 지역으로 손자가 입대하게 되어 면회차 왔는데, 오다 보니 바로 본인이 싸웠던 현장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껴 당시가 불현듯 떠올라 수소문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획에도 없던 발굴 작전을 당장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즉시 해당 지역 부대에 협조를 구해 그 의문의 방공호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1m를 파고 들어가도 아무것도 없이 큰 돌만 나왔습니다. 직접 삽을 들고 한 삽 한 삽 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거의 2m 깊이를 파고 들어갔을 때 발뒤꿈치뼈가 식별되었습니다. “와, 찾았다.” 모두가 열심히 주변 흙을 거둬냈고, 유가족 두 분도 현장에 와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전사자의 모습! 꿈과 같은 현실이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세 분이 발굴되었는데, 한 분은 목 부분에 낙하산 천으로 만든 스카프(당시 중공군에 포위된 상황이라 보급품을 공중에서 투하하였다고 함)를 두르고 있었고, 한 분은 키가 제법 커(현장 발굴에 참여한 충북대 박선주 인류학 교수의 판단) 보였습니다. 그리고 제일 뒤에 있던 세 번째 분은 한쪽 다리 부분이 없고 키가 가장 작았습니다. 집주인 안○○ 씨의 꿈에 나타난 아버지가 한 이야기 그대로 유해가 발굴된 것입니다.
“아버지!” 발굴을 지켜보던 전사자의 외동딸 김○○ 씨의 외마디 외침. “아버지, 얼굴은 어떻게 생겼어요?” 또 하나의 슬픈 장면이 이곳 현리 땅에서 펼쳐졌습니다. 쓰러지는 유족을 응급조치하여 외딴집으로 모시고 우리는 발굴을 마무리했습니다.
세상살이라는 것이 착하게 산다고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악하게 산다고 벌을 받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전 한반도 공산화라는 목표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인명을 앗아간 김일성 일가는 지금도 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런 잘못도 없이 단지 명령을 좇아 싸웠을 뿐인 호국 영령들은 이렇게 앙상하게 뼈만 남아 무려 50년 동안이나 가족과 생이별한 채 차디찬 땅속에 묻혀있어야만 했던 현실을 어떻게 변명해야 정의가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할 수 있을는지.
김○순 일병의 유해를 발굴하는 데는 사실 사위인 정○○ 씨의 절대적인 노력이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내의 소원(죽기 전에 아버지를 꼭 찾아야 한다.)을 들어주기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얻은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유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재가하신 부인을 찾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재가하신 분과 그 가정의 명예를 위해 모녀의 상봉 자체가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었습니다만 결국 우리의 주선으로 동해항 모처에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은 “그런 엄마 나는 없다.”고 등을 돌렸고 눈물만 흘리던 엄마는 아무 말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위가 억지로 두 사람의 손을 한 번 붙잡게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혹독했던 6·25전쟁은 이렇게 한 모녀의 인륜과 정마저도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아 하늘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