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콘서트>
예수 │ 사람들이 내가 누구라고 말하더냐?
제자들 │ 혹자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혹자는 엘리야, 혹자는 예언자라고 하던데요.
예수 │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베드로 │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시지요.
예수는 누구에게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경고했다.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의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의미의 칭호다. ‘충무공 이순신’의 충무공이 이순신의 칭호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어로는 ‘Christos’이고, 히브리어로 ‘Messiah’다. 기독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던 17세기 중국인은 ‘Christ’를 ‘基督’으로 표기했고,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이들의 모임’을 ‘기독교’라 부르고 있다.
역시 우리에게 예수의 칭호로는 그리스도보다 ‘사람의 아들’이 좋다. 예수는 대중 앞에서 자신을 그리스도라 자칭하지 않았다. 예수가 가장 좋아했던 자신의 호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사람의 입보다 정직한 것은 사람의 손발이다. 2000년 전 지중해 동부 해안 ‘갈릴리’라는 땅에서 중병으로 고통받던 아픈 이들을 치유하고 돌아다닌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예수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행적은 치유였다. “나가라!” 귀신이 나간다. “깨끗해지라!” 문둥병이 낫는다. “일어서라!” 앉은뱅이가 걷는다. “보라!” 눈먼 딸이 눈을 뜬다. “너의 죄를 용서한다!” 중풍 병자가 몸을 움직인다. “나의 힘으로 너를 낫게 한 것이 아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소문내지 마라.” 예수는 겸손했다.
우리가 보는 역사는 모두 왕과 장군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백성은 통치 대상일 뿐 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 복음서에서는 어부와 세리와 창녀와 문둥이가 삶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화 〈벤허〉를 보면 문둥병자들이 깊은 골짜기에 처박혀 숨어 사는 모습이 나온다. 육체적 고통도 힘들었을 것이고 사회적 고립도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천벌을 받았다는 자기 파멸 의식 때문에 문둥병자들은 괴로웠을 것이다. 사회의 저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이들이 바로 예수의 이웃이었다. 이것 하나로 예수의 삶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에 남는다.
바리새인은 제자들에게 묻는다. “너희 선생은 왜 죄인들과 어울리는가?” 예수는 버림받은 자들의 편이었다. 요샛말로 ‘왕따’들이 예수의 친구였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이는 아픈 사람이지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예수는 일침을 놓는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40일 동안 굶으면서 시련을 이겨낸 예수가 한 말이다. 요즘 우리에게 딱 어울리는 금언이다. 철저히 물질적 탐욕을 거부한 예수이지만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군중을 보면서 가슴 아파한다. 굶주린 거지들을 보면서 아파하는 장면이야말로 ‘사람의 아들’ 예수의 진면목이다.
“3일 동안이나 나와 함께 있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이들을 보노라니 내 마음이 아프다. 아무것도 먹이지 않고 이대로 돌려보내면 집으로 가는 길에 쓰러질까 걱정된다.” 빵 일곱 덩이로 4,000명의 거지를 먹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이 기적 기사를 불가능한 ‘사건’으로 생각한다. 예수는 일곱 덩이의 빵을 손에 쥐고 엄청 울었을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가진 것 없는 거지라도 마지막 죽기 직전 먹으려고 숨겨놓은 빵 한두 덩이는 있는 법이다. 얼마나 통곡했을까? 예수의 절실한 기도를 듣고 모두 가슴이 움직였을 것이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그럼 내가 먼저.’ 너도 내놓고 나도 내놓다 보면 4,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빵이 남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예수에게도 행복한 한때가 있었다. 마르타라는 여인이 예수를 집으로 초대한 것이다. 예수님이 집에 오셨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마르타는 부엌에 들어가 열심히 찬을 마련한다. 한데,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 옆에 착 달라붙어 예수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다. 심사가 뒤틀린 마르타, 예수에게 다가와 투정한다.
마르타 │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나는 바빠 죽겠는데 동생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있으니, 부엌으로 가 일 좀 하라고 일러주세요.
예수 │ 마리아가 잘한 것이다. 그대로 두렴.
이 여인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고 말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다. 유대인이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와 이 여인을 어떻게 할지 물은 것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죽이라고 할 수도, 살려주라고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죽이라 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고 살려주라 하면 모세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것이다.
예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 상황을 모면했다. 간음한 여인의 행위에 대한 판결을 묻는 유대인의 질문에 대하여 거꾸로 그들의 순결을 되물은 것이다. 돌을 든 남정네들에게 둘러싸인 여인, 얼마나 불쌍했을까? 《성경》에는 한 여인이 올리브 기름을 자신의 머리에 발라 예수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여인이 예수를 사랑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