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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10. 2017

05. 다섯 번째 방, 상상 노출

<일곱 개의 방>

4월 27일의 기록 

“악몽에 시달려서 괴로워요.” 

“어떤 꿈이죠?” 

“갑자기 누가 내 몸을 만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피부 위로 손가락이 지나가요. 소름이 돋아요. 하지만 깜짝 놀라서 깨면 옆에 아무도 없어요.” 

“그렇군요. 악몽을 자주 꾸나요?” 

“거의 매일 꿔요. 잠드는 게 무서워요.” 

“억지로 잠을 자려고 술을 마시거나 약물에 의존하기도 하나요?” 

“…….” 

“괜찮아요. 천천히, 편안하게 얘기하세요.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도 안심하고 하셔도 됩니다. 이 방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미연씨 동의 없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유출되지 않습니다.” 

“술을…… 매일 술을 마셔요. 그러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으니까요.” 

“악몽을 꾸는 것 말고 사건 뒤에 달라진 점이 또 있나요?” 

“작년부터였던 것 같아요. 혼자 있는 게 무서워요. 특히 밤에는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올 것만 같아요. 그리고…….” 

“네, 계속해보세요.” 

“거울……. 거울을 볼 수가 없어요.” 


5월 4일의 기록 

“사건을 겪은 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해보세요.” 

“1년 정도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냈어요. 별일 아니야, 그냥 잊자……. 정말 잊어버린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조금씩 사람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특히 그 남자와 비슷한 인상의 남자들이 무서웠어요. 결국, 남자들은 전부 멀리하기 시작했어요.” 

“네, 계속해보세요.” 

“그러다 보니까……. 직장생활이 힘들어졌어요.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작성해주신 서류에는 의류회사에 다녔다고 쓰셨는데요. 오래 다녔었나요? 회사에 다닐 때 상황을 이야기해주시겠어요?” 

“네, 크고 오래된 의류회사였어요. 거기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거나, 새로운 상품을 비교하고 결정하는 일이 많았어요. 저는 일을 좋아했어요. 사람 만나는 것도, 새로운 물건을 접하는 것도 다 제가 좋아하는 일이었거든요. 여행도 좋아하고……. 활달한 성격이었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랬군요.” 

“제 적성에 딱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그 사건을 겪은 뒤,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혼자 있고 싶고, 낯선 사람과는 잠시라도 함께 있고 싶지가 않았어요. 특히 남자들은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였어요. 눈빛이 흔들리는 걸 스스로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예전엔 그저 직장 동료였던 남자들까지도 왠지 두렵고 다가가기 싫은 존재로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직장생활이 힘들어졌군요?” 

“네,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죠. 사람들을 피하게 되니까요. 결국,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어때요?” 

“남자가 무서워요. 남자는 믿을 수 없는 존재잖아요? 낯선 남자들은 특히요. 택시를 타면 택시 기사님들이 대부분 남자잖아요. 무서워서 못 탄 지 오래됐어요. 버스, 지하철도 타기가 무서워요. 낯선 사람들과 섞이게 되니까. 그러다 보니 점점 밖에 안 나가게 돼요. 혼자 있어도 무섭고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두려워요.” 

“사건 전에는 어땠나요?” 

“우울하거나 그런 적이 별로 없었어요. 늘 즐겁고, 친구들 만나서 신나게 노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냥 멍하게 하루를 보내요. 자꾸 뭔가 잊어버리고, 아무 의욕도 없어요. 두렵고, 숨고만 싶어요.” 

“왜 두렵죠?” 

“그 남자가 절 찾아내서 죽일 거니까요. 어딘가로 숨어야 해요. 그 남자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다섯 번째 방, 고통의 시간을 극복하게 하는 상상 노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술을 마시는 고깃집, 조금 늦은 시간까지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카페, 급할 때 들르는 공용화장실, 목적하기까지 편하게 타고 갈 수 있는 택시……. 일상의 이런 평범한 장소들이 더 이상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세계가 안전하지 않고 공포스러운 곳이라는 생각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어떤 이들은 마치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반복되는 것처럼 느끼며, 그 사건이 연상되는 모든 환경과 공간, 사람 등을 회피하는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밝고 활달해 누구와도 쉽게 어울렸던 미연도 사건 후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사건이 벌어졌던 공용화장실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공간이 되었고, 남성을 보기만 해도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였기에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PE 치료를 통해 미연은 그간 회 피해왔던 많은 상황들을 상상 노출로 직면하게 됩니다. 너무나 두려워 회피해온 기억을 되살려 다시 언어로 표현해내는 일은 상상 이상의 고통을 주지만, 미연은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모아 차분히 정리하는 힘든 과정을 잘 견뎠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했던 일들에 도전하면서 트라우마를 이겨내, 이제는 씩씩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인간이 가진 ‘기억’이라는 능력은 학습과 생존을 위해 필요합니다. 하지만 기억에만 얽매이면 몸은 현재를 살지라도 마음은 계속 과거를 살게 됩니다. 물론, 과거의 기억이 불현듯 우리를 괴롭힐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삶에 충실해지려 노력한다면, 과거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시간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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