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콘서트>
그대들에게 묻노라. 섣달 그믐밤을 지새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관방 쓸쓸한 등불 아래 잠 못 이룬 사람은 왜 그랬는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을 탄식한 사람은 왕안석(王安石)이었고, 도소주(屠蘇酒)를 나이순에 따라 마시면서 젊은이보다 나중에 마시게 된 서러움을 노래한 사람은 소식(蘇軾)이었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서글픈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_ 이명한, 《백주집(白洲集)》 권20, 〈문대(問對)〉 중에서
늙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섣달 그믐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것은 가버린 한 해가 아쉽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청춘을 그리워하는 것은 서글프다. 그런데 여기 노년을 예찬하는 글이 있다. 청춘 예찬이 아니라 노년 예찬 말이다. 바로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며, 장년은 위엄이 있으나 노년은 원숙하다. 노년의 원숙함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다. 키케로에 따르면, 늙어간다는 것은 성숙해가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인격의 완성을 뜻한다. 키케로가 말하는 노년의 축복과 즐거움을 만끽해보자.
늙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섣달 그믐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것은 가버린 한 해가 아쉽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청춘을 그리워하는 것은 서글프다. 그런데 여기 노년을 예찬하는 글이 있다. 청춘 예찬이 아니라 노년 예찬 말이다.
“모든 사람이 다 스키피오처럼 위대한 승리를 회상하며 살 수는 없는 법이네. 또 다른 노년도 있다네. 조용하고 우아하게 보낸 부드러운 노년 말일세. 저술 활동을 하면서 여든하나에 세상을 떠난 플라톤의 노년이 그랬고, 아흔넷에 책을 쓰고 거의 5년을 더 산 이소크라테스의 노년도 그러했다네. 그의 스승인 고르기아스는 107세를 채우면서도 학구열이 식지 않았다지.”
지금 《노년에 관하여》라는 글을 쓰고 있는 이 사람은 키케로다. 그리고 키케로가 소개하는 노년의 주인공은 바로 플라톤이다. 알다시피 플라톤은 스무 살 무렵에 소크라테스 동아리에 들어가 29세에 스승의 죽음을 목격한 뒤, 40세가 지나 그 유명한 아카데메이아를 창설한 철학의 대부다. 61세에 훗날 ‘학문의 제왕’이라 불리게 될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도하기 시작했고, 81세의 나이에 제자의 결혼 피로연을 즐기다 숨을 거두었다. 키케로는 이 플라톤을 노년의 이상적 인물로 제시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이름이 비슷해 우리를 혼동케 하는 이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동시대를 산 아테네의 현자다. 98세를 기록하였으니 대단한 장수(長壽)다. 그는 변론술을 가르치는 학원을 열어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폴리스 간의 대립 항쟁을 중지하고 전(全) 그리스를 통합하자는 범 아테네 통합론을 주창했다. 키케로의 변론술도 이소크라테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소크라테스의 장수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스승인 고르기아스다. 그는 무려 107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고르기아스는 프로타고라스와 더불어 대표적인 소피스트다.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식할 수 없다. 인식할 수 있어도 표현할 수 없다.”로 압축되는 고르기아스의 불가지론은 25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는 소크라테스와 고르기아스 사이에 오간 사상의 혈투, 그것의 생동감 넘치는 중계였다.
키케로는 로마의 공화정을 옹호하여 카이사르의 독재에 맞서 싸운 로마의 정치가이자 웅변가였다. 그는 기원전 106년에 부유한 기사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로마는 공화정이 몰락하는 격변기에 있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이 장군들이 협약을 맺고 로마 공화정을 장악한 것을 역사가들은 제1차 삼두정치라 부른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크라수스가 죽자 삼두정치의 불안한 동거 체제는 무너지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간의 대결이 벌어진다. 키케로는 공화정의 안정을 위해 양쪽의 화해를 촉구했지만,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면서 사태는 내전으로 비화하였다.
“누구를 피해야 할지는 알겠는데, 누구를 편들어야 할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라고 키케로는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한때 키케로는 카이사르를 지지했으나 삼두정치가 와해하고 내전으로 치닫자 공화주의의 입장에서 카이사르에 반대했다. 카이사르의 끈질긴 설득에도 키케로는 결국 폼페이우스 쪽을 선택했다. 공화정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키케로는 카이사르를 독재자라 비판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집트까지 쫓긴 폼페이우스는 파라오의 손에 희생되고 폼페이우스의 목은 양동이에 담겨 카이사르에게 운반된다. 승부는 끝났다.
이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을 관대하게 대한 것으로 유명한데, 키케로에 대해서도 폼페이우스 편에 가담한 것을 문책하지 않았다. 내란이 종식되고 카이사르의 천하가 시작되자 키케로는 칩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한다. 키케로가 불꽃 같았던 젊은 날을 되돌아보면서 노년의 축복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때다.
※ 《노년에 관하여(Cato Maior de Senectute)》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이자 문인이었던 키케로가 평생의 친구인 아티쿠스에게 《우정에 관하여》와 함께 헌정한 글이다. 자신이 주장했던 공화정이 카이사르에 의해 좌절되자 정계를 떠나 은둔하면서 62세 무렵에 이 글을 집필했다. 이 글은 로마 최고(最古)의 역사서 《기원론》의 저자인 카토가 등장하여 젊은이들에게 노년의 의미를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만년의 플라톤처럼 조용하고 순수하게 학문에 매진하는 삶을 예찬하고 젊은이들이 갖지 못한 통찰력과 판단력을 노년의 미덕으로 제시한다. 《노년에 관하여》는 키케로의 또 다른 저서인 《의무론》, 《국가론》, 《수사학》 등과 함께 유럽에 철학적 어휘를 제공하고 그리스 사상을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