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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28. 2017

01. 존재는 존재자의 근거다.

<서양 철학>

만물의 아르케와 존재자의 존재


철학은 존재론으로서 만물의 ‘아르케’, 즉 ‘존재자의 존재’를 해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존재자의 존재’란 표현에서 ‘존재자의’란 소유격은 주격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목적격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유격을 목적격으로 이해하면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자가 바로 그렇게 현존하게 하는 것이며, 존재자가 그런 모양으로 형상화되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자가 드러나 현존하게 하는 것(존재)의 양면성에 주목해야 한다.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는 존재자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실체’(實體; substance)라 할 수 있는데, 이때 실체는 ‘체’(體)의 요소와 ‘용’(用)의 요소를 가진다. ‘체’를 ‘질료적 요소’(氣)라 한다면, ‘용’은 체의 ‘작용원리’(理)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질료적 요소를 물질과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비물질적인 물질’이며, 따라서 단순한 힘 또는 기운(氣運)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힘 또는 기운은 ‘작용하는 힘’(作用力)이기 때문에 체와 용은 동일한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는 존재자의 근거가 되는 실체이다. 따라서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ὀντώς ὄν; ontos on)이라 할 수 있으며, 존재자는 존재가 나타나 있는 것(현상)이기 때문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아낙시만드로스가 주장하듯이 만물이 거기로부터 기원되어 거기로 돌아가는 “동일자”이다. 이 경우 존재론은 존재자의 근원(ἀρχή; arche)이 되는 실체를 다루는 학문이 된다. 이런 의미의 존재론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시작되었는데, 특히 파르메니데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


만물의 근원은 물이나 불이나 다른 어떤 원소들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에게 속하는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근원물질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개념과 그와 관련된 전통은 존재를 질료적 관점에서 이해하였는데, 그의 이런 존재개념은 결국 만물의 근원 또는 근원물질(Urstoff)이 무엇인지 묻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까지 소급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하나의 개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되는데, 이때 질료는 바로 이런 근원물질이라 할 수 있겠다. 근원물질인 질료가 본질형상(εἶδος)에 따라 구체화된 것이 개체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속하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자연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물론 이때 ‘자연’은 포괄적이고 우주적인 자연이며, 스피노자의 개념대로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전의 철학자들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사용한 다양한 개념들 대신 ‘존재’란 개념을 사용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모든 존재자의 근원이 되는 실체에 대해 “무규정자”(τὸ ἄπειρον)란 개념을 사용하였으며. 탈테스는 “물”이라 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 했으며,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 했다. 원자론자들은 “원자”라 했다. 물론 이들이 사용한 다양한 개념들은 축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탈레스의 “물”은 물과 같은 어떤 기운이며, 아낙시메네스의 공기는 공기와 같은 어떤 기운이며,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은 불과 같은 어떤 기운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혼돈”과 “공허” 또는 “수면”과 같은 무규정적인 어떤 기운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현대의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양자장”, “역장”, “힐베르트 공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동양철학의 기(氣)와 같은 어떤 기운일 것이다. 그것은 도(道)의 체(體)에 해당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낙시만드로스의 개념대로 아직 만물로 구체화되기 이전의 “무규정자”(τὸ ἄπειρον)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형태화되기 이전의 무(無)이다.

그러나 실체로서의 존재, 즉 모든 존재자들이 형상화되기 이전의 ‘근원적 무’는 ‘절대무’가 아니다. 왜냐하면 ‘절대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Ex nihilo nihil fit). 근원적 무는 모든 존재자들의 근원인 근원적 존재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현상들의 근원으로서 결코 다른 것으로 변하지 않는 실체(οὐσία)이다. 존재론의 문제는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모든 존재자들의 근거를 이루는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이다.

근원적 무로서 존재자의 존재에 관한 탐구는 파르메니데스에 의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ἐόν)와 현상(δοκοῦντα)를 구분한다. 그의 이런 구분은 후에 원자론자들과 플라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는 가장 원초적인 존재자(ὄντως ὄν)로서 생성소멸하지 않으며, 현상은 파생적이고 2차적인 존재자로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된다(Parmenides, VS 28, B 2; B 8).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철학자들의 철학을 우시아(οὐσία), 즉 원초적 존재자에 대한 탐구라고 규정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을 것이다.(참조, Met. VII, 1 1028 b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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