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위의 오늘>
문재인 의원이 ‘국민성장’을 기치로 내걸고 대통령선거 캠프를 출범했다. 500명의 교수가 참여했단다. 나의 비주류경제학적 연구방향과 정책수단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와 크게 대립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호의를 갖고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신문 기사를 접하고 보니, 문재인에 대한 내 생각이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되어 걱정이다. 몇 가지 검토해 보자.
첫째, 성장이 화두로 제시되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현 단계에서 우리 경제의 획기적 성장이 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이미 들어섰다. 선진국들의 성장률은 대략 2% 미만으로 고만고만하다. 20살이 넘은 청년의 키가 더 크지 않듯이 성숙기에 들면 경제도 획기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키 키우자며 호르몬주사 맞는다고 크지 않는다. 중년이 알통 키우려 헬스클럽 너무 열심히 다니면, 근육이 파열되거나 염증에 시달린다. 보약 먹어도 별수 없다. 잘 지키는 게 최선이다. 물론 혁신함으로써 성장할 순 있다. 하지만 그것은 패러다임적 변화를 전제해야 한다. 패러다임 전환을 쉽게 생각하면 크게 낭패당하니,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자.
현 단계에서는 무리하게 성장률을 끌어올리기보다 균형 잡힌 성장에 주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부와 소득의 분배를 평등하게 개선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단계에서는 더 자연스럽다. 물론 분배를 통해 획기적 성장이 일어날 순 없다. 하지만 건강한 삶, 곧 모든 구성원이 함께 성장하는 발전(development)을 이룰 수는 있다. 그 속에서 획기적이 지는 못하더라도 적절한 성장을 경험할 가능성도 있다.
둘째, 주류경제학자들을 영입했다고 한다. 이 땅에서 주류는 잘나가는 사람들이다. 이 체제에서 잘나갔으니, 이 체제를 개혁하기보다 보호하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곧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물론 주류적 체제에서 천신만고 끝에 잘나가게 된 ‘후천적 주류’도 있다. 나는 이들을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가 만연한 비주류에서 후천적 주류들은 희망을 준다. 나는 비주류에서 주류로 성공한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문재인이 지난 총선 각각 광주 서을 지역과 부산 해운대갑 지역에 출마한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와 유영민 전 포스코경영연구소 사장 같은 성공한 비주류들을 영입한 것을 매우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오리지널 주류, 곧 ‘선천적 주류’는 다르다. 그들에겐 보수적 문화가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들은 비주류의 생각과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 경제학 분야에서는 특별히 그렇다.
주류경제학자들이 문재인 대선캠프에 다수 참여해서 성장이 화두로 내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본래 시장과 자본주의를 개혁할 필요를 못 느낀다. 학자는 이론적 틀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한다. 주류경제학으로부터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아마 말치레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책프로그램의 설계와 그 실행 단계에 들어가면 구체적 행동은 달라진다.
성장을 위해 임금절약이 정당하다 할 것이고,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비정규직의 확대가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게 쉽게 관철되지 않으면, 노동탄압으로 대응할 것이다. 주류경제학자들에게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다른 뭐가 있을까?
혹자는 그들이 기술혁신을 통해 성장하는 방법을 제시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에겐 생소한 말로, 주류경제학의 이론에는 기술혁신이 끼어들 수 없다. 기술혁신이 고려되면 그들의 교과서가 바뀌어야 한다. 교과서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그건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예컨대, 역동적이고 그 결과가 불확실한 기술혁신 활동은 결국 그들이 금지옥엽 귀하게 여기던 ‘일반균형’, 나아가 ‘파레토최적’의 달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그처럼 찬양해 온 자본주의 시장의 조화와 안정성을 설교할 수 없게 된다. 목사가 성서와 다른 말을 하면서 강대상에 설 수 없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