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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12. 2017

10. 무(無)로부터 무를 향하여! (마지막 회)

<서양 철학>

존재와 무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대자적 존재이며, 그가 대자적 존재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처럼 즉자적(의식하지 못함)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지향하는 또는 자신의 가능성을 지향하는 대자적 존재자이다. 그가 대자적일 수 있는 것은 의식의 본성 때문이다. 의식은 ‘그가 아닌 것이면서 동시에 그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의식은 무이다. 인간의 의식은 그의 존재의 한가운데 있는 ‘갈라진 틈’(gap)이다. 물론 ‘갈라진 틈’은 인간의 의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틈은 인간 존재의 핵심적 본질이다. 틈은 틈 없는 틈이다. 틈은 ‘트임’이다. 틈은 개방성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은 틈이며 무이다. 인간의 의식은 자신에게만 갇힌 즉자적 존재가 ‘아님’(무)이며, 트임이다. 이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자를 향해 지향하는 본성을 말한다. 따라서 의식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지향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은 이렇게 타자를 향한 ‘트임’(무)이기 때문에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인간의 의식은 무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지향하는 지향적 의식이다. 결국 인간의 의식이 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대자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인간의 존재는 대자적 존재이며, 인간의 의식은 타자를 향한 트임이기 때문에 대자적이다.

사르트르(Sartre, Jean Paul)


사르트르의 중요한 관심사는 인간의 고유한 존재방식이 ‘무(無)와의 관계성’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자들과 달리 인간은 무를 생각할 수 있는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와의 관계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사르트르가 모든 존재자를 두 부류의 존재방식으로 구분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즉자적(卽自的)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있고 “대자적(對自的)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있다. “즉자적 존재”는 사물들처럼 타자와 관계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는 존재방식을 가리키며, “대자적 존재”는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 즉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계획하고 그 계획을 목표로 하여 추구하는 존재자인 인간의 존재방식을 가리킨다.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향하여 나아가는(對自的)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현재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며, 지금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는 ‘아직 아님’(無)과 ‘더 이상 아님’(無)과 관계하는 존재자이다. 그는 ‘무와의 관계성’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자이다. 이런 ‘무와의 관계성’은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존재자라는 본질적 존재구조에서도 분명해진다. 


의식은 언제나 이미 어떤 것에 대한 의식으로 대상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런 지향작용에서 의식은 이미 자신이 이 대상이 아님을 의식한다. 인간에게는 대자적 존재로서 자신의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자적 존재자는 언제나 즉자적 존재자의 ‘아님’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무와 관계하는 유일한 존재자로서 인간은 운명적으로 자유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로부터의 자유’와 ‘~을 향한 자유’이다. 자유의 근원은 ‘무’(~로부터의 자유)이며, 자유의 목표는 ‘무’(아직 아닌 존재 가능성)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무로부터 무를 향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결단해야 하며, 그렇게 결단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의 자유는 타자에 의해 제한되며 따라서 그의 책임도 타자에 대한 책임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대자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대타적(對他的)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타자는 자아를 존재하게 하면서 동시에 제한하는 기능을 한다. 대자적 존재는 즉자적 존재에 의해 규정되는 한 대자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자적 존재자로서 인간의 제한된 자유와 타자에 대한 무한책임과 관련하여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만일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현재의 자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실존주의의 중요한 과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며, 그의 실존에 대해 전적으로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가 자기의 개인적 존재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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