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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10. 2017

09. 피히테는 왜 칸트를 비판했나?

<서양 철학>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피히테와 주관적 관념론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에 의하면 칸트는 인간 정신의 창조적 능력에 관한 그의 위대한 사상을 철저하게 관철시키지 못했다. 그는 물자체가 인간의 표상능력을 촉발할 때 비로소 인간의 정신능력이 대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함으로써 정신의 절대적 자발성을 간과하였다. 그는 철저하게 비판적이지 못했으며, 아직도 너무나 독단적이었다. 따라서 칸트의 범주들은 여전히 ‘초경험적인 존재형식들’(transzendente Seinsformen)이지 순수한 정신의 자발성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정신은 그의 자유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철학은 독단론이 아니면 관념론인데, 오직 관념론만이 인간을 전적으로 자유롭게 한다. 어떤 종류의 철학을 선택하느냐는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에 달려있다. 피히테는 자유를 원했으며 따라서 관념론을 택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은 오성이 밖으로부터 주어진 감각적 표상들을 종합할 때 형성된다. 이때 오성은 감각 자료들을 판단하는 자발적 능력이기는 하지만 절대적 자발성은 아니다. 오성은 물자체에 의해 촉발될 때 비로소 대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히테는 물자체가 우리를 촉발한다는 칸트의 견해를 거부하고 자아의 절대적 자발성을 강조했다. 즉 경험은 물자체에 의해 촉발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절대적 자발성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가 순수하고 무한한 활동(Tätigkeit)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아의 활동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아는 그 본질에 있어서 순수하고 무한한 활동으로 피히테는 그런 활동을 “사실행위”(事實行爲: Tathandlung)라 한다. 먼저 피히테 자신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것(자아)은 행동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 행위의 산물이다. 행동하는 자이면서 그 행위를 통해 산출된 것이다. 행위(Handlung)와 행위사실(Tat)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존재한다’는 행위의 표현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무엇인가를 하고 그 행위의 결과 무엇인가 생산된다. 


일반적으로 그 행위에 의해 생산된 것은 행위자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예를 들면, 목수와 그 목수에 의해 생산된 책상의 관계가 그렇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순수한 행위 자체에 의해 생산된 것은 행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행위가 행위를 생산하고 그렇게 생산된 행위를 통해 그 행위가 자신의 행위임을 자각하게 된다. 순수한 자아는 행위 자체로서 자아를 산출하고 그렇게 산출된 자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실행위는 ‘(사실)행위’로서 ‘사실(행위)’을 생산하고 그렇게 생산된 ‘사실(행위)’을 통해 자신을 ‘사실행위’로서 확인한다. 절대적 무차별성의 상태에 있던 사실행위가 ‘(사실)행위’와 ‘사실(행위)’로 분화되고, 그런 분화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사실행위를 자각한다. 이때 ‘(사실)행위’는 순수한 자아(Ich)이며, 그 행위에 의해 산출된 ‘사실(행위)’은 ‘비아’(Nicht-Ich)이다. 그리고 이 비아를 통해 자아는 자신의 자아를 확인한다. 


다시 말해, 자아는 그의 즉자적인 상태에서 자신을 자아로서 정립하는데, 그렇게 정립하는 행위를 통해 이미 자아에 대해 비아를 반정립하며, 그렇게 반정립된 비아를 통해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자아를 확보한다. 


절대적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이 자아는 ‘나는 생각한다’는 칸트의 선험적 통각보다 더 근원적이다. 그것은 대상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 자발성의 산물이다. 칸트의 선험적 통각이 대상에 의해 촉발되는데 반해, 피히테의 자아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자발성에 의해 형성된다. 자아의 이런 자기동일성과 함께 비로소 우리는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정립-반정립-종합’의 이런 변증법은 정신의 절대적 자발성의 구조로서 독일관념론의 토대가 된다. 헤겔은 이런 변증법을 존재와 무 사이의 넘어감의 사건을 통해 설명한다. 그러나 변증법이 자기모순 작용이라는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피히테와 헤겔이 모두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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