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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14. 2017

01. 한솔제지는 어떻게 협상에서 이겼나?

<돈을 남겨둔 채 떠나지 마라>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솔제지㈜는 전주공장(현 전주페이퍼)을 노르웨이 기업인 노스케 스코그(Norske Skog) 및 캐나다의 아비티비 콘솔리데이티드(ABITIBI Consolidated)에 매각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 초기 노스케 스코그와 아비티비 콘솔리데이티드의 요구는 전주공장 지분의 50%를 두 기업에 각각 25%씩 매각하라는 것이었다. 한솔제지로서는 50%의 지분을 유지하게 되어 경영권을 지키면서 긴급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세 기업이 참여한 이 협상은 애초 ‘한솔제지 전주공장 지분 매각’이라는 하나의 이슈만 존재하는 분배적 협상의 성격을 띠었다. 즉 한솔제지는 지분을 매각할지 여부, 한다면 몇 퍼센트나 매각할지, 매각가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지분 매각과 관련된 의사결정 및 조율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인수기업과 한솔의 지분이 50대 50으로 같으므로 누가 경영권 확보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지, 그에 따라 매각가격은 어떻게 정할지 등은 쉽게 정하기 어려웠다.

좀처럼 합의에 이루지 못하고 난항을 거듭하던 중, 한솔제지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한솔제지 전주공장의 지분 매각만 논의할 것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을 관장하는 합작법인을 설립하여 시장장악력을 높이고, 이 신규법인의 지분을 세 기업이 동등하게 가짐으로써 단순한 자금투자가 아닌 전략적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으로 협상은 분배적 협상에서 통합적 협상으로 프레임이 전환되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당시 한솔제지는 외환위기 상황에 자금난을 겪으며 구조조정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3개 공장을 모두 팔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던 와중에 전주공장 매수 의사가 들어온 것이었다. 한솔제지의 최대 관심사는 당연히 가능한 한 많은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주공장은 당시 회사의 주된 현금소득원이었으므로 공장에 대한 경영권까지 전면 포기하는 것은 원치 않았으리라 판단된다. 한편 협상상대인 아비티비 콘솔리데이티드와 노스케 스코그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아시아 지역에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하고, 동시에 일본기업을 견제할 만한 규모 있는 생산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분을 싸게 매입하는 것보다는 최대한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한솔제지의 새로운 제안은 자신은 물론 두 상대 기업의 근본 관심사를 동시에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이들은 4개의 아시아 지역 공장을 갖는 새로운 합작법인 팹코(PAPCO)를 설립했다. 한솔제지는 전주공장과 중국 상해공장을 팹코에 매각함으로써 9억 3000만 달러의 자금을 확보했고, 더불어 합작법인에 대해 33.3%의 지분을 유지함으로써 오히려 기존의 공장(전주, 상해)은 물론 청원공장과 태국공장의 경영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비티비 콘솔리데이티드와 노스케 스코그 역시 각각 33.3%의 지분을 가지고 아시아 지역 거점기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원래 관심 있었던 전주공장에 대해서는 초기에 제안한 지분율 25%보다 많은 33.3%의 지분을 확보했다. 두 기업이 연합하면 과반이 되니, 그들의 근본적인 관심사를 충분히 충족시키는 만족스러운 협상결과였다.


초기에 이루어졌던 협상은 전형적인 분배적 협상이었다. 지분율이라는 단일한 의제를 두고 어느 쪽에서 얼마만큼의 지분율을 확보할지 밀고 당기는 파이 나누기 식 협상이었다. 여기에 ‘신규 합작법인 설립’과 ‘아시아 시장 진출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이라는 새로운 의제를 추가함으로써 기존의 분배적 협상에서 벗어나 파이를 키워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통합적 협상으로 협상의 프레임을 바꾼 것이다.

한솔제지의 발상전환은 산업에 대한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사업을 계획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나오기 어렵다. 눈앞의 협상이슈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층 넓고 깊은 관점에서 자신과 상대방의 ‘진짜’ 관심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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