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Apr 14. 2017

08. 학벌장사와 학벌 프리미엄 사이

<경제학 위의 오늘>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온 국민이 거국적으로 학벌에 목매는 이유는 지위가 가져다주는 엄청난 프리미엄 때문이다. 학벌은 지위를 주고, 지위는 권력, 과시, 물질을 덤으로 가져다준다. 지위는 권능을 부여한다.


대한민국에서 학벌은 출신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모든 대학이 학벌의 이름을 다는 건 아니다. 내가 졸업한 지방국립대는 학벌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위의 프리미엄도 누리지 못한다. 서울대를 나와야 학벌이 형성돼, 지위의 프리미엄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지위 프리미엄을 보호하려고 타인의 접근을 배제한다. 콩고물 얻어먹으려 끼어들었다간 이용만 당하고 만다. 얼씬거리지 않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학벌의 높고 낮음은 대략 수능성적으로 평가되는데, 나로선 좀 의아하긴 하지만 이화여대도 그런가 보다. 2006년 <타짜>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도박세계의 냉혹한 현실을 리얼하고 재밌게 그려낸 영화인데, 김혜수가 던진 한마디는 잊히지 않는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사설 도박판을 단속하러 나온 형사에게 쏘아붙인 말이다. ‘나를 우습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형사도 제압할 수 있는 당찬 발언이다. 허접스러운 사기꾼이 거룩한 공권력을 앞에 두고 그런 위용을 발휘할 수 있는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이화여대 학벌의 권능이다. 


이 권능을 향한 욕망이 새로운 단계를 맞았다. 이화여대가 미래 라이프대학을 설립하고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의 고졸재직자 혹은 30세 이상의 무직 성인을 대상으로 4년제 대학 학위를 취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래라이프대학 정원은 150여 명이다. 

     

이대가 제공하는 학위니 오죽할까? 엄청난 수요가 발생하리란 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100% 확신할 수 있다. 학위와 함께 학벌을 주기 때문이다. ‘학벌에 주리고 목마른 자, 다 이대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권능을 주리라!’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이 이런 제도를 도입했다면 그건 ‘학위장사’쯤으로 욕을 먹었겠지만, 이대 프로그램은 ‘학벌장사’로 욕을 먹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학생들의 속내는 어떨까? ‘아, 내가 그처럼 경멸했던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 재직자, 비루한 30세 이상 무직 성인들이 이 향기롭고 달콤한 프리미엄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권능의 배경이 훼손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비루한 자들과 정체성을 공유하면 학벌의 프리미엄은 훼손될 게 뻔하다. 결사항전의 정신으로 막아내야 한다.’

   

내가 보기에 학벌장사를 하는 학교 당국이나 학벌 프리미엄을 독점하겠다는 학생들이나 손들어 줄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학벌을 향해 달려들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 재직자, 30세 이상 무직 성인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다. 모두 ‘학벌’, 곧 손 안 대고 코 풀며 역겨운 쾌감과 불의한 물질을 장사하고, 독점하거나 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겨운 싸움은 학생들 요구로 일단 종결됐다. 그러나 학생들 요구란 무엇이던가? 학위장사 하지 말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학벌 프리미엄을 줄 수 없다는 것 아닌가. 물론 나는 학교 당국의 학위장사와 비민주적 의사결정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들의 순수한 의지를 깎아내릴 의도는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런 학생의 열망을 오히려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그런 학생은 소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대다수는 훼손될 지위 프리미엄을 두려워해 투쟁에 나섰을 것이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이명박의 불통과 박근혜의 독단적 국정운영에 철저히 침묵하던 대다수 이대생이 학교 당국의 ‘비민주적’ 태도에 대대적으로 항거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대 동문과 학부모의 ‘반독재’ 투쟁은 더더욱 그렇다. 

     

나는 이런 해결책을 제시하고 싶다. 21세기는 평생학습시대다. 그리고 늦게라도 학문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배움의 기회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게 평생교육원이든 정규과정이든 상관없다. 이 때문에 이대 당국이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 재직자와 30세 이상 무직 성인들에게 학위를 주고자 하는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대학생들과 동문의 행동방식과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대가 개설한 미디어 콘텐츠 기획・제작과정과 건강・영양・패션을 다루는 웰니스산업 전공을 개설해, 이 분야의 현장에서 실무를 경험한 재직자들에게 학위를 준다는 생각에는 반대한다. 전공과 정과 교육과정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런 전공은 굳이 4년제 대학에서 가르쳐야 할 내용이 아니다. 

     

나아가 그 분야의 현장실무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대가 초빙한 실무전문가의 가르침이 아니다. 사회와 소통하고, 사회와 인간을 체계적으로 해석해 종합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기초인문학, 현장의 실무경험을 체계적으로 해석해 새로운 지적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는 자연과학적 지식과 공학적 원리, 곧 4년제 대학이 기필코 가르쳐야 할 내용이 배움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01. 한솔제지는 어떻게 협상에서 이겼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