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비전>
흔들리는 제왕정, 일어나는 군웅
‘진제국은 법으로 흥하고, 법으로 패망했다.’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진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융통성 없는 가혹한 법이었다. 2세 황제 호해(胡亥)는 진시황 생전에 시작된 거대한 토목공사를 더욱 확대했다. 거기다 부역이 면제되었던 빈민층까지 징발을 확대했다.
진시황이 급서한 이듬해인 기원전 209년 7월, 진승(陳勝)은 양성에서 함께 징발된 900명의 농민을 이끌고 어양으로 출발했다. 대택향에 이르렀을 때 큰 비가 내려 도착이 늦어지게 되었다. 진제국의 법에는 ‘실기개참(失期皆斬)’의 규정이 있었다. 기한을 어기는 자는 무조건 참형에 처한다는 법이다. 이 법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계속 어양으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실기개참’의 법이 있는 이상 그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이래저래 죽을 처지가 된 진승은 친구인 오광(吳廣)과 함께 무리를 모아놓고 이같이 말했다.
“어느 쪽이든 모두 죽게 되었으니 차라리 반기를 드느니만 못하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진승은 곧 ‘대초(大楚)’의 장군을 자처하며 농민반란군을 이끌었다. 그의 거병을 ‘진승·오광의 난’이라고 부른다. 사마천은 『사기』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에서 진승을 높이 평가했다.
“5년 동안 호령이 세 번 바뀌었다(三嬗). 생민(生民) 이래 천명을 받는 것이 이처럼 빠른 적은 없었다.”
진승과 항우, 유방이 짧은 기간에 돌아가며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진승은 어렸을 때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남의 집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승은 잠시 쉬는 동안 좌우를 둘러보며 이같이 말했다.
“만일 훗날 부귀하게 되면 우리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크게 비웃었다.
“남의 집 농사나 짓는 주제에 어찌 부귀를 이룬다는 것인가?”
그가 탄식했다.
“아! 연작(燕雀)이 어찌 홍혹(鴻鵠)의 뜻을 알겠는가.”
연작안지홍혹지지재(燕雀安知鴻鵠之志哉)
진승의 일화에서 ‘연작안지홍혹지지재’라는 성어가 나왔다. 제비와 참새를 뜻하는 ‘연작’은 소인배, 상서로운 상상의 새인 ‘홍혹’은 큰 뜻을 품은 대인을 상징한다. ‘홍혹’은 봉황(鳳凰)과 같은 상서로운 새를 의미하는 고유명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