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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17. 2017

05. 베네치아, 길 잃기에 완벽한 곳

<여행의 취향>

베네치아는 여실히 도시였다. 수많은 물길이 있는 물 위의 도시, 자연을 품은 도시였지만, 그럼에도 그곳의 정체성은 지극히 도시적이었다. 붐비는 사람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 번잡한 교통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이 간직하고 있는 문화는 베네치아가 대도시라는 걸 뚜렷이 보여주고 있었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즐기는 데는 조건이 있다. ‘낯섦’이다. 낯설게 하기. 일상이나 여행이나 낯설고 신선하게 만드는 거다. 많은 이가 여행이란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낯설게 하기’라는 조건이 충족되면, 일상도 신선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여행도 평범하고 무료할 수 있다.

베네치아는 이상하게 낯설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물 때문이었다. 도시를 가르며 흐르는 물도 신기할진대, 물 위의 도시라니. 그거였다. 물이 이 도시에 낯선 시선을 주는 까닭이었다.


물의 도시에서 느긋하게 길을 잃어보기로 했다. 골목골목 숨은 즐거움과 마주하기 위한 자발적 길 잃기를 감행하기로 했다. 말 그대로 감행이었다. 길치에 방향치인 나에게 ‘길 찾기’는 도전이고 모험인데, 반대로 무려 ‘길 잃기’라니. 다행이었던 건 그곳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거였다. 어디를 봐도 아름다움 그 이상의 풍경이 자리한 곳이니, 한순간 넋 놓고 있다 보면 어느새 길과 방향을 잃기 일쑤였다. 다행히 길이란 잃어도 결국은 연결되었다. 잃어버린 길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즐거움을 경험하니 행운이었다. 보이는 아름다운 면면을 즐기고 누리다 보면 잃었던 길도 금방 다시 찾는 기분이라 괜스레 안심이었다. 덕분에 길치 맞춤형 도시에서 매 순간 방심하며 길을 잃었다.


상점가를 걷는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곤돌라(Gondola)를 타러 가는 게 분명했다. 베네치아 대운하에 들어서자 밀집해 있는 곤돌라와 베네치아본섬 대운하에 놓인 세 개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가 보였다. 그 자리에는 본래 목조다리가 있었는데 석조다리의 설계를 공모한 결과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제치고, 안토니오 다뽄떼(Antonio da Ponte)의 설계가 채택되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운하에는 곤돌라 외에 다른 선박들도 많아서, 배에 실리길 기다리는 짐이 무척 많았다. 다리 위와 그 주변에 밀집해 있는 상점과 행상은 베네치아가 상업의 중심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운하 못미처 곤돌라들이 정박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곤돌라를 탈 수 있는 선착장이 베네치아에 꽤 많다. 도시 안쪽에서 탈 수도 있고, 바닷가 바로 앞에서도 탈 수 있다. 곤돌라는 타는 곳, 경로, 요금, 배 모양이 다양하다. 미리 여행일정을 점검하고 자신에게 맞는 경로와 요금을 정하고 골라 타는 게 좋다. 나는 베네치아에서 만난 네 명의 친구와 함께 매우 화려한 실내 장식의 짧은 코스를 도는 곤돌라를 총요금 80유로에 탔다. 본래 곤돌라의 뒷좌석에는 사람이 앉고 앞좌석에는 짐을 싣는데, 요즘은 앞뒤를 포함해 4~5명이 타곤 한다.


곤돌라는 베네치아의 좁은 운하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길고 날씬한 모양으로 발달했고, 한쪽으로만 노를 젓기 때문에 똑바로 가게 하기 위해 비대칭으로 생겼다. 또한, 곤돌라마다 모양과 크기, 내부 인테리어가 모두 다르다. 곤돌리에의 체중, 노를 젓는 습관 등에 따라 각각 다른 곤돌라가 제작되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보여도 모두 제각각 제작이 된 그야말로 수공품. 그러니 이 세상에 똑같은 곤돌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 귀족들이 곤돌라를 경쟁적으로 사치스럽게 장식해 국가에서 이를 금지했기 때문에, 곤돌라의 외부 모습은 모두 검은색이지만, 내부 스타일과 장식은 곤돌리에의 취향에 따라 다르다.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 곳곳을 지났다. 유람선이나 수상버스를 탔을 때는 느낄 수 없는, 수면이 바로 옆에 있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우린 노래를 위한 별도의 요금을 지불하지 않았지만, 친절한 곤돌리에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사진도 많이 찍어줬다. 좁은 물길에서 곤돌라끼리 부딪치지 않기 위해 코너를 돌 때마다 곤돌리에가 우렁차게“ 아~~위~~~” 하는 소리도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


곤돌리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그들을 육체노동자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베네치아의 엄친아다. 곤돌리에가 되기 위해서는 체력, 성악등 몇 차에 걸친 시험에 통과해야 하고, 곤돌리에가 되면 한 척에 1,000만 원을 호가하는 곤돌라를 일단 돈을 빌려 만드는데, 이 돈은 성수기에 한 달 일하면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이제 따로 성수기라는 게 없을 정도로 인기 있는 여행지여서 웬만한 곤돌리에는 돈을 아주 잘 번다고 한다.

곤돌라 덕분에 기분은 계속 상승 모드. 불현듯 바닷물에 손을 넣으려다 멈칫했다. 베네치아의 바닷물은 깨끗하진 않다. 물을 배경으로 한 베네치아의 풍광과 비 내린 길 위의 반짝임은 매우 아름답지만, 그 물은 손을 넣어볼 만큼 깨끗하지는 않다. 낭만적인 분위기에 그윽하게 젖었다가 현실적인 물색에 냉큼 손을 거둬들였다.

곤돌라에서 내려 다시 길을 잃기 시작했다. 골목골목 거닐며 베네치아 먹방을 시작했다. 곤돌라 타러 가는 길에 봐두었던 초코타르트와 믹스과일을 먹으며,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렸다. 


작동을 중지한 분수대에 앉아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으로 엄청나게 크고 맛 좋은 피자를 먹었다. 그 분수대는 여행객들에게 좋은 식사장소로, 피자를 사 오기 전만 해도 빽빽하게 사람들이 있어서 못 앉았는데 피자 사 오고 나니 휑하니 자리가 났다. 


상점 바로 옆 아까는 비어있던 정말 작은 계단 위에 한 가족이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귀여운 모습이 보였다.


배를 채우고 베네치아 본섬을 돌아보고 있자니, 작은 규모의 퍼레이드와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쁘게 차려입고 행복한 표정으로 춤추는 사람들을 잠시 흥겹게 구경하고, 베네치아의 유명한 칵테일인 스프리츠(spritz)를 마시러 갔다. 2.5유로밖에 안 하는 저렴한 술로 더위를 달랠 참이었는데, 달달하니 맛있긴 했지만 혼합주여서 그런지 마시자마자 취기가 올라왔다. 살짝 해롱해롱. 그래도 낮술은 진리다. 생각해보니 베네치아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도 스프리츠를 마신 일이었다. 물의 도시에서의 첫날도 마지막 날도, 아니 매일 매일을 더욱 달콤하게 만들어준 게 이 칵테일이었다.

칵테일을 마시며 베네치아에서의 길 잃기를 이어갔다. 길 잃기에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곳, 길 잃기에 안성맞춤인 물길과 골목길을 거닐며 자꾸만 용감해진다. 술기운까지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 세상 어느 길치, 방향치도 베네치아에서라면 길을 잃어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베네치아에서는 발과 눈을 자유로이 둘 수 있다. 걸음이 어디로 향하건, 눈길이 어디서 멈추건, 보이고 대하는 건 아름다움일 터이니 말이다. 언제고 마주할 낯설고 익숙한 그 도시의 풍광을 그리며, 다시 그곳에서의 길 잃기를 기대해 본다.

베네치아에서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길치가 되길 즐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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