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결혼했을까>
사례
언제부턴가 남편의 귀가 시간이 다가오면 A 씨는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낀다. 큰아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남편의 퇴근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요즘엔 문밖에서 남편과 비슷한 발소리만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남편과 가능한 한 많이 대화를 나눠 남편을 이해하려고도 해봤다. A 씨가 바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거창한 일도 아니다. 그저 다른 부부들처럼 남편 K 씨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둘이 함께 헤쳐 나가는 것, 단지 그뿐이다.
연애할 때만 해도 K 씨는 충분히 그런 남편이 될 것처럼 보였다. K 씨는 말수는 적은 편이지만 A 씨의 말을 항상 귀 기울여 들어주고 필요할 때마다 현명하게 조언해주었다.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과묵한 모습은 진중한 사람처럼 보여 더욱 믿음이 가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그런 모습은 계속됐다. 주로 말을 거는 쪽은 A 씨였다. 퇴근한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 그날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은 아내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크게 싫은 내색 없이 잘 들어주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K 씨는 아내 A 씨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귀찮은 기색을 역력히 보였다. A 씨에게 대화 상대가 절실하거나 든든한 버팀목이 필요할 때조차 남편 K 씨는 아내를 외면했다.
남편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작은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서부터다. 작은아이는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 후 A 씨는 아이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유명하다는 곳을 찾아 상담을 받으러 다니고 조금이라도 아이의 상태가 나아질 방법은 없는지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물론 치료 교육도 받았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노력하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A 씨는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몰라 했다. 모든 것이 자기 탓 같기만 해서 자책하다가도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억울한 생각이 들어 A 씨의 마음속은 더없이 혼란스러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편에게 아이의 상태가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신세 한탄을 하거나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러나 A 씨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 말고 누구에게 털어 놓겠는가. A 씨는 당연히 남편이 이해하고 공감해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남편의 반응은 아내의 기대와 달라도 한참 달랐다. 남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가슴이 터지기 직전까지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쏟아내면 남편은 화난 표정을 짓거나 무시하는 등 A 씨의 기대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A 씨의 노력과 행동을 하나하나 부정하거나, 마치 남의 일인 양 무심하게 굴었다. 급기야 이 모든 책임이 A 씨에게 있다는 투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A 씨는 그저 남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픔에 공감해주길 바랐을 뿐이었는 데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책망하며 무력감에 떨고 있던 A 씨는 남편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아이 문제를 의논할 사람이 남편밖에 없었고, 남편도 아빠로서 자식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이 외면해도 A 씨는 매달리다시피 붙들고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요즘 남편은 A 씨가 무슨 얘기를 하든 혼자 맥주를 들이켜며 아예 귀를 닫아버리고 무시하기 일쑤다.
남편의 태도에 속이 상한 나머지 “왜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 거예요? 당신 아이이기도 하잖아요”라고 채근하듯 말하면, 남편은 화를 버럭 내며 “당신이 그렇게 예민하게 구니까 애가 저 모양인 거야!”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점점 늘어나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도 점점 아빠를 멀리하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어떻게든 아빠를 이해시키려고 변명하지만, A 씨 역시 남편에 대한 깊은 실망과 분노를 떨쳐버릴 수 없다.
물론 남편 K 씨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K 씨는 막중한 책임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원래 기술직이었던 그는 사람들을 통솔하거나 거래를 성사시키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데, 그런 사정을 속 시원히 터놓고 말할 사람이 없다. 집에서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의 머릿속은 회사 일로 가득 차 터질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제아무리 자식 일이라고는 하지만, 밤마다 희망 없는 아이의 상태에 대한 푸념이나 아내의 신세 한탄을 들어야 하는 일은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아내의 말은 왠지 아빠인 자신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회사 일만으로도 벅찬데 아이 문제까지 떠넘기려 들다니 도대체 나한테 어쩌라는 건지 되묻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결국 거친 말을 내뱉고 아내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그렇게 이들 부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어긋날 뿐이었다.
한편, A 씨는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면서 잠자리만 요구하는 남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당연히 응할 마음이 없을뿐더러 그런 남편이 혐오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하자 K 씨의 태도는 더욱 괴팍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퇴근해서도 다녀왔다는 말 한마디 없이 술만 마시고, 조금이라도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술기운을 빌려 아내에게 고래고래 폭언을 퍼부으며 난동을 부렸다.
잔뜩 겁에 질린 아이들은 아빠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숨죽이고 있다가 다음 날 아빠가 출근하면 그제야 겨우 안심하고 얼굴을 폈다. A 씨는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과 남편이 같이 살고 있는 건지 도저 히 알 수 없다. 과연 이혼 말고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 A 씨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위 사례에 대한 처방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