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살림살이 경제학>
이 모든 뒤틀린 사태의 핵심은 살림살이가 아닌 ‘돈벌이 경제’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인생 성공(좋은 삶)이라 보는 패러다임이 오늘날 우리 삶을 지배한다. 원래 돈이란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삶은 돈보다 구체적이고 다차원적이다. 그러나 돈은 추상적이고 양적이며 일차원적이다. 삶에는 만족이 있지만, 돈은 만족을 모른다. 무한대(無限大)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면 무한대가 아니라 무(無)가 된다. 삶은 한계점이 존재하기에, 역설적으로 이를 인정하기만 하면 매 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다.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바른 경제’는 첫째, 자기 땀의 결실을 충분히 거둘 수 있는 보람 있는 경제, 둘째, 타자의 희생(착취·억압·수탈·전쟁)을 전제로 하지 않는 떳떳한 경제, 셋째, 사람이 자연 속에 자연스레 깃들어 사는 겸손하고 소박한 경제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부동산·이자·화폐 경제는 첫째, 자기는 땀도 흘리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불로소득 경제, 둘째, 무수한 타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 폭력의 경제, 사람이 자연을 파괴하면서 물질적 이익을 취하려는 오만한 경제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 구체화되었다.
첫째, 장시간·고강도·비인간 노동을 기초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을 떨칠 필요가 있다. 소박하게 먹고사는 데 충분한 정도로 건강하고 즐겁게 일하되, 그런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노조활동이나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둘째, 겨우 집 한 채 산 뒤 그 집값이 폭등하기를 바라기보다는 누구나 주거권을 누릴 수 있도록 정책변화를 고민하고 토론해 나가야 한다.
셋째, 힘겨운 노동을 감수하며 돈을 더 벌어 자녀를 (선행학습, 학원, 과외, 등을 통해) 점수 잘 받는 기계로 만드느라 자신의 삶은 물론 아이의 삶까지 희생시키지 말고, 평소에 아이들이 소망하고 꿈꾸는 것을 존중하고 그런 방향에서 경제적·정서적 지원을 해야 한다. 어른의 삶이 중요하듯, 아이들의 삶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넷째, 아이들이 두려움 없이 꿈을 꾸고, 어른들이 불안감 없이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사회구조의 변화, 특히 교육 시스템, 노동 시스템, 복지 시스템, 경제 시스템 전반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에서는 ‘삶의 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적 필요는 충족이 가능하지만, 자본의 탐욕은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오르는 대로, 내리면 내리는 대로 사람들의 삶은 고통을 받는다. 이자가 올라가든 내려가든, 돈이 늘든 줄든, 달러가 올라가든 내려가든, 주가가 오르든 내리든 민중의 삶은 ‘이중의 덫’에 빠진다. 하나는 이익을 얻는 자와 손해를 보는 자로 분열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체 민중이 그런 돈벌이 경제에 강박적으로 종속된다는 것이다. 이제 돈벌이 경제에서는 상업도 산업도 금융도 별 돌파구가 없고,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속으로는 별 알맹이가 없음이 거듭 확인된다. 이렇게 우리는 이중, 삼중의 덫에 걸려 죽기만을 기다리는 들짐승의 신세가 될 것인가?
지구(우주)는 인간(인류)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인간은 지구 없이 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본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자본은 인간(노동자, 소비자, 납세자) 없이는 생존도 증식도 어렵다. 따라서 ‘생존권’에 대한 우선순위는 단연코, ‘자연>인간>자본’ 순이다. 즉, 자본은 인간 앞에 겸손해야 하며, 인간은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부동산·이자·화폐를 매개로 작동하는 자본은 지양해야 한다. 자본을 내면화한 노동 역시 그래야 한다. 현재의 정치경제구조도 그런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 1879년에 명저 『진보와 빈곤』을 출간한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오래된 제안처럼, 토지 소유는 인정하되 거기서 나오는 이득(특권)인 지대(rent)는 온 사회가 공유하는 식으로 말이다. 구조와 의식이 같이 변해야 비로소 모두에게 좋은 삶이 가능하다. 이런 사회적 각성과 실천이 너무 늦지 않으면 좋겠다.